아직도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와의 화해는 요원하다. <위대한 두 진리(Two Great Truths)>는 과정사상가이며, 화이트헤드의 뒤를 이어 과정신학의 계보를 잇는 존 캅의 제자이고 과정사상연구소를 함께 운영했던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박사의 책이다.

근대 이후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과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만큼 ‘과학적(논리적)’이 됐으며, 그에 반하여 기독교 신앙은 더욱 근본주의로 치닫고 있다. 그리핀 박사는 과학과 종교 간의 논쟁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을 끌어들여, 전적으로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된 두 세계관의 근본적인 종합을 제안한다.

저자는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이란 이름으로 명명된 두 전통 모두가 위대한 진리 즉, 보편적 정당성과 중요성을 지닌 진리를 구현하고 있지만, 양자 모두 왜곡돼 왔으며, 과학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가 지닌 비전 사이에 갈등을 부추겨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핀은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 사이에 본래적 갈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정사상으로 모색한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과의 화해

기독교의 본래적인 믿음과 가르침을 유신론적 자연주의로 복원시켜낼 수 있는가? 그리핀이 던진 이 질문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인 뿐만 아니라, 이 시대 대부분의 지성인에게도 매우 낯설다. 근대 후기(19세기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서 ‘자연주의’는 매우 한정된 세계관, 즉 감각주의적 인식론과 유물론적 존재론의 조합으로 구성된 세계관의 대명사가 됐고, 이에 맞서 교회는 과학이나 철학과의 대화에서 반지성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초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고집하며 기독교 신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구 지성사에서 벌어진 기독교 신앙과 과학·철학과의 관계를 살펴 양자의 애증관계를 먼저 해명한다. 이로써 현대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관념 체계 안에 깊이 자리 잡은 반지성주의를 극복하면서 무신론으로 귀착된 근대의 과학적 자연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밝힌다. 이를 통해 양자의 대립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며, 양쪽의 관심과 해명을 종합하는 데까지 나가면서 자신의 구성주의적 포스트모던 신학(constructive postmodern theology)을 전개한다.

탁월한 과정사상가인 그리핀에게 이 작업은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일반적 사유체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과정철학의 핵심적 이상을 구현하는 일이다.(신)정통주의적 신학에 익숙한 기독교 신앙인은 그리핀의 통합적 방법론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냐하면 근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한 가지 뼈아픈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를 간추려보면 이렇다.

과학적 신념과 종교적 신앙이 조화로운 관계를 누렸던 17세기가 지나고, 기독교 신학이 이신론(deism)으로 굳어지던 18세기 과학과 종교는 갈등과 균열을 경험한다. 이 시기 신학은 과학적 자연주의와 계몽주의 철학의 파고를 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대화를 시도한 자유주의 신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그 방법론이 해명의 깊이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기독교는 19세기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핀에 따르면, 그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이 결코 종교적 세계관을 담을 수 없는 왜곡된 자연주의를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 이후 기독교 교회가 선택한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평화로웠던 (17, 18세기적) 과거의 기억(이신론)으로 회귀하여 안전(무신론으로부터의 문단속)을 도모했던 유아론적 시대로의 역행이다. 이 시대착오적 흐름은 교회의 안전에 대한 열망이 진실했기 때문에 신앙인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재등장한 옛 정신으로서 자기 시대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투밖에 없었다. 이 전투적인 정신이 근본주의 신학이란 이름으로 19세기 말에 등장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학이 교회 안에서 승리할수록, 교회는 시대정신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기 시대를 이탈한 정신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뚜렷한 가르침만 남겼다.

다른 하나는 소위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이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지성을 흡수했지만, 그 방법론(과학적 자연주의의 활용)을 활용하지는 않았다. 대신 기독교 신학의 성격과 과제를 독립시켜 독자성을 얻으려 했다. 어쩌면 이것은 밀려오는 시대 사조에 대한 소심한 대응이요, ‘진정한 진리는 서로 대립될 수 없다’는 직관을 언어에 담으려 했던 기독교 신학의 이상에서 이탈한 현상학적 차이에 대한 호소다.

이안 바버가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에서 갈등도 독립도 대화도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통합 모델을 제시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엔 갈등의 독선, 독립의 순수, 대화의 열정만으로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위치한 포스트모던 시대를 헤쳐 갈 수 없다는 가르침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리핀처럼 바버 역시 과정철학의 세례를 받고 있음을 눈치챈 사람들은 진정성을 의심한다. 특히 일반적 사유체계로의 통합이라는 사상적 목표에 대해 포스트모던의 해체주의 정신은 정당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핀이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을 따라가며 배우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특히 기독교 신학이 (초)자연주의와 맺어 온 다채로운 관계를 훑다 보면 초자연주의에 경도된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사고방식이 지닌 편향을 보게 되고, 과학적 자연주의가 근대 초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는 동안 겪게 된 변화를 이해할 때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사적 가치와 한계를 알게 된다. 또 유신론적 자연주의 세계관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교리주의적 집착을 끊을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보다 풍요로운 기독교 신학의 전통을 경험하고 보다 창조적인 기독교 신학의 미래를 꿈꾸게 될 것이다.

실로 기독교 신학의 전통은 오늘 신봉하는 교리보다 훨씬 크다. 책임 있는 기독교 신학은 교리를 단순히 희화화해서 전복시키려 하지 않고, 교리의 잘못된 기제를 무력화할 수 있는 창조적인 긍정을 통해 전통의 참된 의미를 오늘에 되살릴 것이다. 그리핀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래적 가르침을 창조적으로 긍정하는 방식을 취해 온 과정신학의 이 전통에 충실하다.

이 책은 그리핀 박사가 은퇴할 무렵에 출판된 것(2004년)으로, 그의 사상적 원숙미가 잘 드러나 있다. 다른 저술에 비해 비교적 작은 분량으로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리핀의 과정신학적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