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보다 깊은 상처를 입은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을 때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심으로써, 우리가 낫게 된 것입니다.”(벧전2:23-24. 쉬운성경)

상처입으신 주님은 그 상처보다 더 따뜻한 사랑으로 제자들을 대해주셨습니다. 도리어 제자들의 상처를 감싸주시고, 아물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마음의 상처를 받을 때마다 주님을 더욱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더 큰 사랑으로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상처받은 사건이 아니라, 사랑의 사건이라고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치유의 사건이요, 기적의 사건이라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들려주시는 듯 합니다.

존 레인 여사가 [보배]라는 책에서 “히야신스”라는 식물을 소개했습니다. 이 식물은 꽃을 피우기 위해 여러 주 동안 캄캄한 곳에서 자라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때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캄캄한 곳에 머물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실패, 실직, 이혼, 사별, 오해, 질병, 마음의 고통, 믿음이 식어지는 어두움 등. 그러나 이러한 어두움의 긴 터널을 지나는 기간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두움보다 더 강하신 주님의 빛 아닐까요? 우리가 아무리 어두움 가운데 잠시 거한다 하더라도 본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빛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에드윈 마크햄(Edwin Markham)이 “커다란 참나무가 바람을 견뎌낼 때면 가지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들여마시고, 줄기는 바람 쪽으로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고 했습니다. 터지는 슬픔을 아는 영혼만이 터지는 환희를 알 수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슬픔은 우리 마음에 기쁨의 자리를 넓혀주기 위해 찾아오는지도 모릅니다. 매킨토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일으켜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며,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며, 잠잠히 기다리게 만든다. 우리가 경솔하게 부산을 떨며 발버둥쳐보았자 얻을 것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어려움에 처하거나 당황스러운 상황에 봉착했을 때, 잠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처사다. 우리가 믿는 마음으로 기다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주께서 나의 마음에 큰 기쁨을 채워주시니 이 기쁨은 곡식과 새 포도주가 가득할 때의 기쁨보다 더 큽니다. 내가 평안히 누워 잠을 자니 나를 이렇게 안전하게 돌보아 주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뿐이십니다.”(시편4편 7-8절, 다윗의 시)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사는 종, 이기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