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제가 살아온 삶 가운데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 기억속의 성탄절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연극연습도 즐거웠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새벽송을 돌며 그 추위에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불러주었던 캐롤송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자라난 모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이북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남으로 내려오신 분인데, 고난이 축복이라는 설교를 자주 하셨습니다. 본능적으로 행복을 찾는 우리에게 어떻게 고난이 축복이란 말인가 의문이 생겼지만, 설교를 다 듣고 나면, 표현하기 어려운 깨달음이 생겼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그 내용을 다 잊었지만 요즘 저는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씀을 곱씹어 묵상합니다. 그리고 지금 고난받고 있는 성도님들께 이 묵상이 도움이 될까 싶어 글을 씁니다.


첫째, 고난은 우리를 정화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라.”(벧전4:1)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라고 하면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라고 고백했습니다. 남자들의 시집살이라고 불리는 군대에 갔더니 마음이 가난해지더군요. 논산훈련소에서 일주일 내내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엎드려 뻗쳐, 기합만 받다가, 그 주일에 교회에 갔는데, 찬송 1절을 부르자마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둘째, 깊은 영성, 깊은 인격, 깊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어렵고 힘든 현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미숙한 태도를 성숙하게 만들고, 원숙한 단계를 거쳐 노련한 단계까지 이끌어주는데 고난만큼 좋은 스승이 있겠습니까? 성경의 인물들을 유심히 살펴봐도, 하나님이 귀하게 쓰셨던 종들은 모두가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한 장만 읽어봐도 이 사실이 여실히 입증됩니다. 어느 유명한 직공이 자신이 최근에 개발한 옷감을 선보였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색깔이 어지럽게 뒤섞여있고, 매듭지어진 실이 풀어헤쳐진 듯한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뭐가 이렇게 생겼어?”라고 수근거릴 때, 그 직공은 웃으면서 너저분한 천을 뒤집어 훌륭하게 도안된 작품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두들 옷감의 뒷면을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고난을 그와 같이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째, 고난은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만들어줍니다. 고난이 없다면 우리가 절박하게 주님을 찾을까요? 사도 바울은 고통속에 살았습니다. 육체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를 계속해서 쓸모있게 하시고자, 겸손하게 하시고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지만 도리어 그의 연약함이 주님만 의지하게 해주었고, 그를 위대한 사도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찌끼가 제해지고, 정금같은 모습으로 나오기까지 욥을 연단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복을 주고 계십니다.
연약한 종, 이기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