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독교 역사상 유래없는 부흥을 일군 한국 교회. 부흥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의 하나로 ‘새벽기도’를 꼽는다. 본지는 미주한인교회의 부흥을 염원하며 부흥의 바람을 일으킬 새벽 기도회 현장을 찾고, 은혜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스물 여덟번째로 찾은 곳은 뉴욕한인중앙교회(월~토 오전 6시)다. 조한경 목사가 시무하는 이 교회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표어로 하며, ‘복음을 위해 앞장 서자’가 조 목사의 목회철학이다.
12월 8일 조 목사는 역대하 17장 6절부터 9절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다. 조 목사는 “자아라는 자기 우상을 제거하고 예수님을 배우자”고 전했다.
역대하 17장
6절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7절 그가 왕위에 있은 지 삼 년에 그의 방백들 벤하일과 오바다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
8절 또 그들과 함께 레위 사람 스마야와 느다냐와 스바댜와 아사헬과 스미라못과 여호나단과 아도니야와 도비야와 도바도니야 등 레위 사람들을 보내고 또 저희와 함께 제사장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내었더니
9절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
다음은 설교 말씀이다.
유다에 아사왕이 죽고 난 후에 그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 왕이 되었습니다. 아사왕이 일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고 우상을 제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인생 말년에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군대와 재물에 의지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그 아들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의 신실한 모습을 많이 봐서 인지 신앙이 좋습니다. 여호사밧은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 했습니다. 아버지도 왕위에 오르자 종교 개혁을 했는데 아들도 산당과 우상을 없애는 동일한 종교 개혁을 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때 정의 사회 실현을 위해 부정부패를 없앨려고 했지만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 처럼 옛날에 아사왕 때 두번에 걸쳐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산당과 아세라 목상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상이 한번 들어오면 뿌리 뽑는게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아 왕 때도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산당과 바알 그리고 아세라 목상을 제거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대로 있습니다. 사악한 사탄의 활동은 순간적으로 쇠퇴하는 것 같지만 존속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저지른 이래로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인류는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성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에 들어와서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영적으로 무장하는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항상 과거에 자기 신앙 체험을 상기하면서 늘 내가 이러 이러했는데라는 획일적인 신앙으로 돌아갈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무궁무궁한 하나님의 능력을 개인의 능력 속에 묻어두려고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로 날마다 먹었듯 우리도 그러한 일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서 단 한번의 실패만을 목적으로 하지 안습니다. 지속적으로 괴롭힙니다. 우리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서 돌아갈 때까지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신앙의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화라는 것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조금씩 하나님께로 나아가다가 우리의 삶은 끝날 것입니다.
산당이 제거되는 종교개혁이 계속된것 처럼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제거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히스기야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왕 등 많은 이들이 우상을 없앴지만 끝내 우상 숭배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 만큼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우상을 끌어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우상 중에 가장 큰 우상은 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끌어내리기 어렵습니다.
아세라처럼 우상들을 불에 태워도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우상은 나의 자아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 나는 매일 매일 죽노라고 말입니다. 다르게 해석하면 매일 매일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안그럼 이 자아가 살아서 하나님에 대해서 자꾸 대항합니다. 그래서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여호사밧은 산당도 없애고 좋은 출발을 했습니다.
9절에 보면 사람을 보내서 유다 각 성읍에 보내서 가르치게 합니다. 바알을 없애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모르고 살았기에 교육을 합니다. 우상만 없앤다고 우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인 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레위인과 제사장을 파송해서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도시를 다니며 신앙 교육을 하는 겁니다.
6절에서 보는 것 처럼 산당을 제거하고 우상을 제거했지만 백성들에게 직접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던거 같습니다. 돌덩어리만 없앤다고 우상이 사라지는게 아니고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면에 정신적인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교육 없이 돌만 없앤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보시고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목수로 30대 청년이라고 볼 때 약한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한 예술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돌아가신 후 십자가에서 내렸을 때 예수님이 누워 있는 모습을 발쪽에서 머리 쪽으로 보는 각도에서 그렸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님은 아주 건장한 목수입니다. 실제 예수님이 목수 출신인데 아주 호리호리한 타입은 아닐 겁니다. 안내 데스크를 뒤집어 엎었다고 해보십시요. 예수님의 마음이 불 붙었습니다. 사람을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도 일종에 예수님의 종교개혁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마틴루터도 또 종교개혁을 합니다. 종교 개혁은 끝났습니까?. 지금도 여전합니다. 인터넷 등의 발달로 전세계가 지구촌이라는 문화권에 묶여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의로움이나 선이 번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악이 퍼져나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을 배우시요’라고 말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파송해 가르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얼마나 신앙 교육을 하고 있습니까?. 어릴 때 자라난 이들이 얼마나 신앙의 기본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예수님은 부활하셨는지 등을 알고 자라고 있습니까?.
아이들에게도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그전에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교육을 맡은 전도사님과 교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사님께 우리의 자녀들의 영혼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닮아가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가를 돌아보는 도전이 되는 말씀이 되기 바랍니다.
스물 여덟번째로 찾은 곳은 뉴욕한인중앙교회(월~토 오전 6시)다. 조한경 목사가 시무하는 이 교회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표어로 하며, ‘복음을 위해 앞장 서자’가 조 목사의 목회철학이다.
12월 8일 조 목사는 역대하 17장 6절부터 9절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다. 조 목사는 “자아라는 자기 우상을 제거하고 예수님을 배우자”고 전했다.
역대하 17장
6절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7절 그가 왕위에 있은 지 삼 년에 그의 방백들 벤하일과 오바다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
8절 또 그들과 함께 레위 사람 스마야와 느다냐와 스바댜와 아사헬과 스미라못과 여호나단과 아도니야와 도비야와 도바도니야 등 레위 사람들을 보내고 또 저희와 함께 제사장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내었더니
9절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
다음은 설교 말씀이다.
유다에 아사왕이 죽고 난 후에 그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 왕이 되었습니다. 아사왕이 일평생토록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고 우상을 제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인생 말년에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군대와 재물에 의지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그 아들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의 신실한 모습을 많이 봐서 인지 신앙이 좋습니다. 여호사밧은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 했습니다. 아버지도 왕위에 오르자 종교 개혁을 했는데 아들도 산당과 우상을 없애는 동일한 종교 개혁을 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때 정의 사회 실현을 위해 부정부패를 없앨려고 했지만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 처럼 옛날에 아사왕 때 두번에 걸쳐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산당과 아세라 목상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상이 한번 들어오면 뿌리 뽑는게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아 왕 때도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산당과 바알 그리고 아세라 목상을 제거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대로 있습니다. 사악한 사탄의 활동은 순간적으로 쇠퇴하는 것 같지만 존속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저지른 이래로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인류는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성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에 들어와서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영적으로 무장하는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항상 과거에 자기 신앙 체험을 상기하면서 늘 내가 이러 이러했는데라는 획일적인 신앙으로 돌아갈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무궁무궁한 하나님의 능력을 개인의 능력 속에 묻어두려고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로 날마다 먹었듯 우리도 그러한 일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서 단 한번의 실패만을 목적으로 하지 안습니다. 지속적으로 괴롭힙니다. 우리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서 돌아갈 때까지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신앙의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화라는 것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조금씩 하나님께로 나아가다가 우리의 삶은 끝날 것입니다.
산당이 제거되는 종교개혁이 계속된것 처럼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제거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히스기야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왕 등 많은 이들이 우상을 없앴지만 끝내 우상 숭배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 만큼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우상을 끌어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우상 중에 가장 큰 우상은 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끌어내리기 어렵습니다.
아세라처럼 우상들을 불에 태워도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우상은 나의 자아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 나는 매일 매일 죽노라고 말입니다. 다르게 해석하면 매일 매일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안그럼 이 자아가 살아서 하나님에 대해서 자꾸 대항합니다. 그래서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여호사밧은 산당도 없애고 좋은 출발을 했습니다.
9절에 보면 사람을 보내서 유다 각 성읍에 보내서 가르치게 합니다. 바알을 없애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모르고 살았기에 교육을 합니다. 우상만 없앤다고 우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인 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레위인과 제사장을 파송해서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도시를 다니며 신앙 교육을 하는 겁니다.
6절에서 보는 것 처럼 산당을 제거하고 우상을 제거했지만 백성들에게 직접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던거 같습니다. 돌덩어리만 없앤다고 우상이 사라지는게 아니고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면에 정신적인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교육 없이 돌만 없앤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보시고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목수로 30대 청년이라고 볼 때 약한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한 예술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돌아가신 후 십자가에서 내렸을 때 예수님이 누워 있는 모습을 발쪽에서 머리 쪽으로 보는 각도에서 그렸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님은 아주 건장한 목수입니다. 실제 예수님이 목수 출신인데 아주 호리호리한 타입은 아닐 겁니다. 안내 데스크를 뒤집어 엎었다고 해보십시요. 예수님의 마음이 불 붙었습니다. 사람을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도 일종에 예수님의 종교개혁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마틴루터도 또 종교개혁을 합니다. 종교 개혁은 끝났습니까?. 지금도 여전합니다. 인터넷 등의 발달로 전세계가 지구촌이라는 문화권에 묶여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의로움이나 선이 번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악이 퍼져나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을 배우시요’라고 말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파송해 가르칩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얼마나 신앙 교육을 하고 있습니까?. 어릴 때 자라난 이들이 얼마나 신앙의 기본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예수님은 부활하셨는지 등을 알고 자라고 있습니까?.
아이들에게도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그전에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교육을 맡은 전도사님과 교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사님께 우리의 자녀들의 영혼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닮아가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가를 돌아보는 도전이 되는 말씀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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