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유럽은 루터와 칼빈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1509-1547)는 카톨릭교회 신앙수호에 충실했다.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개혁사상이 문서를 통해 영국에 소개되자 헬리8세는 이 개혁신앙을 저지하여 교황으로부터 “믿음의 옹호자”라는 칭호까지 받았지만, 왕비 케서린과의 결혼을 무요화해달라는 청원을 교황청이 거부하자 카톨릭교회와 등지게 되었다.

아라곤 왕가 출신 케서린과 결혼한 헨리 8세에겐 정을 통하는 여인 앤볼린이 있었다. 아들을 원하는 헨리에게 앤볼린은 정식결혼하지 않으면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버텼다. 헨리 8세는 교황청에 캐서린과의 결혼에 대해 무효선언을 청원했다. 교황 글레멘스7세(1523-1534)는 이 청원을 기각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카톨릭교회와 결별 수순을 밟았다. 헨리는 1534년 국왕이 영국교회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다고 규정한 [수장령]을 제정하고 자치권을 행사하는 국교회를 출범시켰다.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자 셋째 아내 시모어의 소생인 에드워드 6세(1547-1553)가 아홉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캐서린의 딸 메리(1553-1558 )가 왕위를 이었다. 메리 여왕은 개혁신앙을 지지하는 학자와 성직자들을 화형에 처하는 등 카톨릭교회로 복귀하려고 애썼지만 일찍 죽어 앤볼린의 딸 엘리자베스1세(1558-1603)가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중간을 유지하는 교회정책으로 영국 국교회의 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엘리자벳1세 여왕 치하에서 국교회를 따르지 않던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들은 핍박을 받았다. 처음에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홀랜드(네덜란드)로 갔다. 홀랜드에서 10여년의 생활은 생활고와 자녀의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영국 국왕은 청교도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스코틀랜드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왕위를 계승해 제임스1세(1603-1625)가 되었다. 제임스1세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청교도에게 국교회를 따르도록 강요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교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 신대륙으로 떠나게 되었다.

102명의 청교도들은 1620년 9월29일 항해를 시작해 11월 9일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케이프 코드만에 도착했다. 그들은 41일 후 12월 20일에 플리머스 땅에 첫 발을 내딛었다. 청교도들이 도착한 때는 겨울이라 추위와 굶주림과 질병과 인디언들의 습격 등 악조건 속에 1621년 2월 28일까지 과반수인 50명이 죽었다. 남은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개척 의지를 불태우며 정착의 꿈을 펼쳐 나갔다. 순례자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룬 후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