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의와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롬9장 6절에서 마지막 절까지 보며 오늘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일까? 그들이 수가 많아서 일까요? 아니지요. 그들이 애굽에 들어 갔을 때 겨우 70여명에 불과 했습니다. 그들이 잘 생겼기 때문일까요? 아니지요. 미스 유니버스가 그동안 별로 안 나온 걸로 봐서는 그건 아닌 거 같고, 머리가 명석해서? 그것은 우리가 인정을 하는데.. 그러나 과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은 4가지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원리에도 적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1. 첫째는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에 기초한 것이지 민족 이나 인종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롬 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다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닌 것과 같이 같은 혈통을 가졌다고 해도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롬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우리의 인종이나 혈통이 아닌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러하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구원 받은 것입니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의식이나 외적이 요소가 아니고 내적인 변화에 기인한 것이라 말 하는 것입니다.

롬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그러므로 이모든 성경구절을 살펴보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믿는 이스라엘 백성과 믿는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할머니가 권사입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목사였습니다. 이말 보다는 제가 주를 믿나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되는 것이지 우리의 선호도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롬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장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지요. 하나는 이스마엘이고 다른 하나는 이삭입니다. 이스마엘은 사라가 아이를 갖지 못할 것으로 생각이 되어 자신의 종인 하갈에게서 자손을 얻으라고 아브라함을 밀어 넣습니다. 86세 때에(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 구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십 삼세이었더라) 아들을 낳는데 그게 이스마엘입니다. 후에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러 가는 여호와의 사지를 아브라함이 만나게 되는데 거기서 사라를 통하여 자손을 얻으리라는 예언을 듣는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창17: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원하나 하나님은 약속의 자손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자손은 기적으로 옵니다. 이삭은 바로 기적의 아들입니다. 아브라함도 웃었고, 사라도 웃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이름이 웃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은 불신의 웃음 이였지만 하나님의 웃음은 약속 성취의 미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 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이지 우리의 행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Providence not Performance. 이미 잘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여기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롬 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과 에서의 삶이 바로 이것에 대한 일례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보다는 에서를 더 사랑하였으나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였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야곱보다 못해서가 아니고 야곱이 더 낳아서도 아닙니다. 두 사람의 선택에는 그 어떤 행위나 조건이 선행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 섭리만이 이 신비를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13절의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은 아무런 선악간에 행위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선택을 하셨는데 에서는 미워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이 저도 많이 궁금했었습니다. 실제로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미워하셨을까요? 이것은 바로 성경 해석의 가장 기초인 문맥을 잘 살펴봐야만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자 바울이 인용한 것은 바로 말라기서 1장 2-3절의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문맥과 상관없이 해석하려고 하다 보니까 교리적인 오류에 스스로 빠져들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동적으로 어떤 사람은 사랑 받도록 선택하셨고 어떤 사람은 증오의 대상이 되게 하셨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자 말라기는 야곱과 에서가 살던 시대로부터 2000년 후에 쓰여진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칭하는 대상은 야곱이 한 개인이 아니고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스라엘 민족과 에돔 족속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보세요 말라기의 시작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1:1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바울이 이 부분 전체를 인용한 것이 아니고 2절과 3절의 일부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형제 이면서도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에돔족 에서의 후손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돔족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와 도덕적인 타락으로 하나님을 떠난 민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부분을 의식하면서 한 개인이 어떤 선택의 기회도 없는 상태에서 버림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선택받은 자의 후대의 삶을 보여 줌으로서 선택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의 결과가 이렇게 다르지 않느냐, 그 결과의 판이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당신의 선택의 섭리가 온전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즉 택함을 받은 사람의 결과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미워하다는 뜻은 증오의 뜻이 아니고 대조, 비교 한다는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도 증오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선택의 우선순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인용하시면서 너희 부모님을 공경 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이것을 전체 문맥을 무시한 채 해석하게 되면 예수님이 모순을 드러내시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경에 모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표현의 다른 점이 바로 이 단어의 용례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하게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어떤 두 가지를 비교하는 경우에 미워하다의 뜻은 바로 선택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