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사무실로 이름 모르는 성도님이 전화를 하였습니다. 지난 번 비엔나의 모 교회에서, 인근의 기도원 주최로 가졌던 부흥회에 참석했던 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후, 전화선을 따라 문자 그대로 폭포수같은 간증이 주체할 줄 모르고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부흥회라는 것을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부흥회 말씀들을 통하여 지금까지의 신앙 생활동안 터득했던 모든 진리들이 마치 하나로 꿰듯 선명하게 깨달아지는 은혜를 얻었지요. 마지막 날 집회 때, 방언이 터졌고, 하나님의 사랑이 주체할 수 없이 느껴져, 부흥회 이후 지금까지 저는 마치 구름에 떠다니는 듯한 느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고, 복잡했던 법정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되는 등 믿기지 않는 기적이 저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 믿는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요?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에요(이 표현을 여러 번 거듭하셨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얻은 느낌입니다. 저는 본래 수줍어서 남들하고 말도 잘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사람들만 만나면 예수님을 자랑하고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수다쟁이가 되었답니다. 며칠 전에는 전화로 전도를 했는데, 6시간 만에 그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게 아니겠어요! 나 같은 게 전도까지 한 거에요. 얼마나 기쁜지, 이 기쁨, 감격, 감당할 수 없어 용기를 내어 이렇게 목사님께 전화를 드려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뿜어내듯 터져 나오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찬양, 감사와 기쁨의 고백들이었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뜨겁고 신선한 간증이었습니다.

통화를 끝낸 후, 그 부흥회가 결정되기까지의 시간들이 잠깐 제 머리에 스쳐갔습니다. 저는 보통 사람들보다 몸이 약합니다. 그래서 오래 서 있거나 움직이는 것이 불편합니다. 우리 교회 목회하는 것, 선교지 집회 인도만으로도 사실 벅찹니다. 때문에 국내에서 부흥회 요청이 들어오면, 대개의 경우, 일단 거절부터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님의 세미하지만 분명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제, 너를 간절히 원하는 집회 요청을 수락하라.” 그 음성을 듣고, “이제는 순종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 날 중으로 3군데에서 집회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 망설이고, 사양하고,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가까스로 지난 비엔나 집회가 결정이 된 것입니다. 집회 결정 이후,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또다시 들렸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흔들어 누르고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 6:38) 그리하여 ‘아낌없이 주는’ 집회가 되기를 결정하고 기도하면서, 우리 교회 반주자, 찬양 사역자까지 동원하며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그 곳에 붓고자 최선을 다하였지요.

부흥회 이후, 참석자들로부터도 은혜의 간증들이 들리고 있지만, 우리 교회에서도 예배의 모든 부분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이 이전보다 더 강력하게 느껴지며,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는 성도님들의 고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또다시 인디애나에서 열리는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교회를 비웁니다. 이번에도 역시 “주라...그리하면 줄 것이니..” 라는 성령의 음성 속에 아낌없이 쏟아주기로 결정하고, 당회원들의 동의를 따라 우리 교회 찬양 목사님 부부까지 동행하며 함께 부흥회를 인도합니다. 지금까지, 국내 집회를 위하여 담임 목사와 찬양 목사가 함께 주일에 교회를 비우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다른 교회들을 축복하고자 할 때, 우리에게 더 큰 은혜가 부어질 줄 확신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우리가 받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주라, 줄 것이니.” 부디, 받은 은혜, 물질, 시간 등, 더 주고 나누심으로 범사에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