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현재의 고난은 미래에 주어질 영광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첫 번째 질문이 문제가 생기면 누구랑 먼저 의논을 하느냐? 라면 이번 것은 문제를 어느 것과 비교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겪는 문제와 비교를 합니다. 이것이 항상 나쁘다고 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다른 사람이 당하는 어려움과 비교해서 덜 힘든 것일 때 우리는 다소간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이건 문제 해결의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따라서 내가 기분이 좀 낫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므로 올바르지 않은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언젠가는 내 문제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아~~나 땜에 다른 사람이 행복해서 좋다~~이런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문제를 다루는 방법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통여하에 따라서 경감을 따지지 말고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미래의 영광에 비교를 하라는 것입니다.(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세상을 떠날 때 성경을 외웠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 18절 말씀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앞을 보았습니다. 지금 좀 고난이 있지마는 앞에 있는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비교할 수 없는 그 영광을 바라봅니다. 환하게 바라봅니다. 그는 이걸 외우고, 외우고 외우다가 27번을 외우고 마지막에 는 마저 외우지 못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 속에는 바로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과하여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무엇을 비교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오늘도 여러분은 무엇을 비교하고 여기에 나왔습니까?

주님의 날과 이 세상의 날을 비교하여 보니 고라 자손들처럼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 줄 알고 나왔습니까? 이 세상의 지식보다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기 때문에 나왔습니까? 정말로 여러분들이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를 하늘의 영광과 비교하여 보니 상대가 되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돈하고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여 보았습니까?

우리가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고난과 앞으로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여 보면 정말로 상대가 되지 않습니까? 믿으십니까? 정말로 상대가 되지 않고 비교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고난이든지 우리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떠한 유혹이 불어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도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과 지옥을 비교하여 보았습니까? 거저 막연히 천국은 지옥보다는 좋은 곳이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가치관이 분명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자랑도 주 예수를 자랑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즐거움도 주님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다는 신앙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항상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비교하며 살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것처럼 불안한 것이 없습니다. 정말 스트레스 받아 못 삽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음을 고백하면서 오직 예수만 믿고 오직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만일 그렇지를 못하면 우리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탄식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2절에 보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피조물은 자연만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 아름다운 화초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것들이 어떻게 탄식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합창으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보기에 심히 아름답고 찬송의 소리가 그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은 파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연에서 불협화음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기 시작하고 피조물들이 썩어진 데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자연환경에 대하여 관심이 많이 있는데 이러한 자연보호 운동도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환경오염의 주범은 인간의 죄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주범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한 자연은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들이 지금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19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고대한다고 하는 말은 고개를 쑥 빼고 누가 오나 안 오나 하고 앞을 열심히 내다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일월성신과 삼라만상이 고개를 쑥 빼고 우리가 영광중에 나타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이러한 말씀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사는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오죽하였으면 말 못하는 피조물들까지도 그 날의 영광을 사모하며 탄식하고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어찌 그 날을 사모하지 않겠으며 이 세상을 바라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땅 덩어리가 신음하고 있는 탄식 소리를 들으면서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의 탄식 소리를 들을 때에 어찌 복음을 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날마다 이 땅의 썩어 없어질 것들을 위하여 탄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세기를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신천신지를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고 그 날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23절에서는 피조물만 탄식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성도들도 탄식한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성령 받은 우리가 탄식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부패한 몸이 주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변화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롭게 변화될 그 날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성령님은 탄식합니다.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면 유익이 없습니다.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들면 영적인 기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다루면서 24,25절에서 이렇게 명쾌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우리들이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고 이 땅에 것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날 하늘의 영광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이 있다면 소망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를 못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살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하고 잘되면 교만하고 못되면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이는 소망은 참된 소망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 확실히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갈 천국에 대한 확신은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 손으로 만지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미래에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확실히 있는 자는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을 오히려 기쁘게 여깁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고난을 받으면 지금 당장은 어렵고 힘이 들지만 그러나 고난이 통과한 후에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이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선 당장에 편하고 쉽게 살면 좋겠지만 그것은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하는 데는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신앙도 편한 쪽으로만 나가면 결단코 하나님 앞에서 무거운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문명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비근한 예로 Cell 폰을 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어린아이들까지도 핸드폰 들고 다니는 세상이 되지를 않았습니까? 사실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그러나 편한 것만큼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전자파로 인하여 건강에 치명상을 줄 수도 있다는 의학계의 보고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아이들은 중독이 되어서 학습능력도 떨어진다고 합니다. 어른들도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지금 우리가 모든 면에서 편하고 빨리 무엇인가를 이루는 추세로 나아가다 보니 어렵고 힘이 들고 당장에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나아가다는 앞으로 지구가 큰 멸망에 빠질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의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겠으며 자연만물의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므로 이루어질 영광의 그 나라를 바라보십시다.

영광의 그 날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현재의 당하는 고난을 잘 참고 견디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당장의 눈앞에 편리한 것만 생각하지 말고 멀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욥의 고백과 같이 우리의 나아갈 길을 오직 하나님이 알고 계시니 하나님만 믿고 그 어떠한 어려움도 참고 이겨내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우선 당장에 조금 이익이 있다고 하여 신앙의 양심을 접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는 망령된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한국 크리스천 중에는 너무도 쉽게 신앙의 양심을 팔아먹고 이 세상과 타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들에게 지탄을 받고 전도의 길을 가로 막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가벼운 것이고 무엇이 무거운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가벼운 것은 바람이 불면 날라 가버립니다. 불에 다 타 없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불에 타서도 없어지지 아니할 금보다 귀한 믿음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믿음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무엇을 비교하면서 살아가시겠습니까? 장차 우리에게 주실 영광과 비교될 것은 이 땅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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