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의 한인 사회가 교회에 대한 루머로 가득합니다. 이제 더 이상 한 특정 교회가 아니라 시카고를 대표하는 큰 교회로 하나씩 하나씩 갈등이 전염되는 현실에서 어둠의 세력들이 기세를 떨치는 유형을 봅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집단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가십거리가 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고 믿는 자들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밖에 없게 하는 슬픈 현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다른 면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들이 날을 세우고 공격을 해 오는 것은 그들이 위험을 느낀다는 신호이며 그 위험에 대비해서 기선을 잡겠다는 몸부림이기 때문입니다. 쓰나미를 감지하고 내륙으로 미리 대피했던 짐승들처럼 바람의 도시인 시카고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징조를 눈치챈 악의 세력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파괴하려는 작전에 돌입한 것이라고 보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연대할 때입니다. 서로 옳다 그르다 다투는 사람들의 내용에 호기심을 갖지 말고 그 배후에 역사하는 영적인 싸움을 직시하며 기도해 주어야 할 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개교회의 옳고 그름이나 해결책에 대해 왈가왈부 논하고, 교회 갈등에 대한 좌담회가 열리고, 변호사들이 고용되고, 법정으로 비화되는 상황들을 보면서 교회의 분쟁이나 믿는 이들 사이의 충돌은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보여주는 구절의 백미가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말은 전 인류를 사랑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믿는 자들끼리의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만을 사랑하셨다는 내용이 아니고 교회만을 사랑하셨다는 것도 아니고 온 “세상” 그 속에 속한 모든 영혼을 사랑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교회, 내 교인만 염두에 두고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기 뜻대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든 가정이든 개인간의 관계이든 사람사는 세상에 분쟁이나 다툼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유들도 참으로 다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10여년 넘게 상담하는 것이 직업이었던 사람으로 너무도 다양한 문제들을 심층깊은 내용까지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유형과 저마다 다른 배경과 모래알 같이 많은 문제들을 들었지만 양파껍질 벗기듯이 문제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면 결국 도달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어떤 부부가 상담을 하러 와서 그들이 가진 여러 문제 때문에 싸우고 미워하고 이혼을 이야기 할 때 그 저변에 깔린 내용은 사랑을 받고 싶다는 호소거나 사랑이 없다는 항변입니다. 반항하는 자녀의 마음깊은 곳의 내용은 사랑받고 싶다는 외침이고 개개인의 갈등 속의 가장 내밀한 곳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공통된 요소가 있습니다. 그 간단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설득력있는 내용들을 거론하며 싸우고 다투는 것입니다. 사랑 하나면 모든 분쟁은 해결됩니다. 기독교에서는 더더욱 사랑을 떠나서는 어떤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말 가운데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오해되고 남용되는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너무도 흔하게 언급되기에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의미를 안다고 또한 오해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어에서 보여지는 다섯가지 다른 단어가 영어의 사랑이라는 단어 ‘love’ 하나로 번역되어 쓰여지고 있습니다.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이 다섯가지 중 적어도 성경에 나오는 세가지 내용은 구별해야만 사랑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다섯가지는 첫째, 에로스(Eros)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이해하는 내용으로 감각적인 욕망을 내포하는 사랑입니다. 에로스를 의미하는 사랑은 성경에 아예 나타나지 않습니다. 둘째, 필레오(Phileo)는 우정 또는 사랑할 이유가 있기에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소터고(Sotergo)로 서로 의지하는 의미의 사랑입니다. 이 의미의 사랑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넷째, 테로(Thelo)는 무엇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할 때의 사랑입니다. 다섯째, 아가페(agape) 사랑은 초자연적인 사랑으로 무조건적이며 이유가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불순종하고 이기적이고 흠투성이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베드로에게 사역을 맡기고 전선으로 내보기 전에 주께서 물으셨던 단 한가지 내용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주께서는 무조건적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지만 베드로는 이유가 있어서 하는 사랑 즉 필레오로 사랑한다고만 대답하면서 울었습니다.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적어도 친구로서의 사랑 즉 필레오의 사랑은 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 나타나는 15가지의 증거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와 있습니다. 증거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마 5:43)이나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벧전 3:9)는 말씀 등은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지를 알아보게 하는 시금석이 되는 말씀들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믿는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하는 거짓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구별하는지에 대한 말씀이 요한일서 4장 20절에 적혀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교회에서 싸운다고 다 교인들이나 믿는 자들의 분쟁이 아닙니다. 목사를 포함해서 많은 교인들이 이 말씀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분쟁하는 사람들이나 곁에서 참견하는 사람들은 분쟁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숨이 넘어갈 만큼 할 말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유가 있으니 다툼이 있고 분쟁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당부하신 내용은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신 32:35, 롬 12:9, 히 10:30)는 것입니다.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일임을 구약과 신약의 여러 책에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인간이 하고자 하는 것은 죄 가운데도 정녕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생각하면 분쟁하는 내용의 정당성을 찾기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예가 일만 달란트를 면제받은 사람이 그 60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빚밖에 없는 빚쟁이를 용서해 주지 않자 면제받은 빚이 취소되고 처벌을 받는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 18: 24-35) 또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말씀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처럼 말하고 기독교인처럼 보인다고 해서 다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의 뜻대로 행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가르침을 경시할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 그 절대적인 지상명령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가 무엇보다도 사랑할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본질은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가족 그리고 교회의 분쟁에 있어서도 크고 비밀한 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필(feel)이 꽂힐 때만 할 수 있는 감정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고 흉내라도 내려고 할 때 가능한 아가페의 사랑만이 그 답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개교회의 옳고 그름이나 해결책에 대해 왈가왈부 논하고, 교회 갈등에 대한 좌담회가 열리고, 변호사들이 고용되고, 법정으로 비화되는 상황들을 보면서 교회의 분쟁이나 믿는 이들 사이의 충돌은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보여주는 구절의 백미가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말은 전 인류를 사랑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믿는 자들끼리의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만을 사랑하셨다는 내용이 아니고 교회만을 사랑하셨다는 것도 아니고 온 “세상” 그 속에 속한 모든 영혼을 사랑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교회, 내 교인만 염두에 두고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기 뜻대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든 가정이든 개인간의 관계이든 사람사는 세상에 분쟁이나 다툼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유들도 참으로 다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10여년 넘게 상담하는 것이 직업이었던 사람으로 너무도 다양한 문제들을 심층깊은 내용까지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유형과 저마다 다른 배경과 모래알 같이 많은 문제들을 들었지만 양파껍질 벗기듯이 문제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면 결국 도달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어떤 부부가 상담을 하러 와서 그들이 가진 여러 문제 때문에 싸우고 미워하고 이혼을 이야기 할 때 그 저변에 깔린 내용은 사랑을 받고 싶다는 호소거나 사랑이 없다는 항변입니다. 반항하는 자녀의 마음깊은 곳의 내용은 사랑받고 싶다는 외침이고 개개인의 갈등 속의 가장 내밀한 곳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공통된 요소가 있습니다. 그 간단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설득력있는 내용들을 거론하며 싸우고 다투는 것입니다. 사랑 하나면 모든 분쟁은 해결됩니다. 기독교에서는 더더욱 사랑을 떠나서는 어떤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말 가운데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오해되고 남용되는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너무도 흔하게 언급되기에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의미를 안다고 또한 오해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어에서 보여지는 다섯가지 다른 단어가 영어의 사랑이라는 단어 ‘love’ 하나로 번역되어 쓰여지고 있습니다. 신약은 그리스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이 다섯가지 중 적어도 성경에 나오는 세가지 내용은 구별해야만 사랑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다섯가지는 첫째, 에로스(Eros)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이해하는 내용으로 감각적인 욕망을 내포하는 사랑입니다. 에로스를 의미하는 사랑은 성경에 아예 나타나지 않습니다. 둘째, 필레오(Phileo)는 우정 또는 사랑할 이유가 있기에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소터고(Sotergo)로 서로 의지하는 의미의 사랑입니다. 이 의미의 사랑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넷째, 테로(Thelo)는 무엇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할 때의 사랑입니다. 다섯째, 아가페(agape) 사랑은 초자연적인 사랑으로 무조건적이며 이유가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불순종하고 이기적이고 흠투성이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베드로에게 사역을 맡기고 전선으로 내보기 전에 주께서 물으셨던 단 한가지 내용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주께서는 무조건적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지만 베드로는 이유가 있어서 하는 사랑 즉 필레오로 사랑한다고만 대답하면서 울었습니다.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적어도 친구로서의 사랑 즉 필레오의 사랑은 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 나타나는 15가지의 증거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와 있습니다. 증거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마 5:43)이나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벧전 3:9)는 말씀 등은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지를 알아보게 하는 시금석이 되는 말씀들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믿는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하는 거짓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구별하는지에 대한 말씀이 요한일서 4장 20절에 적혀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교회에서 싸운다고 다 교인들이나 믿는 자들의 분쟁이 아닙니다. 목사를 포함해서 많은 교인들이 이 말씀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분쟁하는 사람들이나 곁에서 참견하는 사람들은 분쟁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숨이 넘어갈 만큼 할 말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유가 있으니 다툼이 있고 분쟁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당부하신 내용은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신 32:35, 롬 12:9, 히 10:30)는 것입니다.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일임을 구약과 신약의 여러 책에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인간이 하고자 하는 것은 죄 가운데도 정녕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생각하면 분쟁하는 내용의 정당성을 찾기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예가 일만 달란트를 면제받은 사람이 그 60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빚밖에 없는 빚쟁이를 용서해 주지 않자 면제받은 빚이 취소되고 처벌을 받는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 18: 24-35) 또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말씀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처럼 말하고 기독교인처럼 보인다고 해서 다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의 뜻대로 행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가르침을 경시할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 그 절대적인 지상명령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가 무엇보다도 사랑할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본질은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가족 그리고 교회의 분쟁에 있어서도 크고 비밀한 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필(feel)이 꽂힐 때만 할 수 있는 감정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고 흉내라도 내려고 할 때 가능한 아가페의 사랑만이 그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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