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폭설이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데이빗에게 큰아이의 부츠를 미리 사다 놓으라고 부탁을 했다. 눈이 드믄 이 지역에서 오랜만에 찾아 오는 큰 눈은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가져올 것 같았다.

둘째 아이는 큰 아이가 쓰던 부츠며 방수가 되는 바지, 눈장갑 등이 있어서 걱정이 없었는데 큰 아이에게는 모든 것을 새로 장만해 주어야 했다. 큰아이에게는 이번 눈에 처음이 아니어서 눈에서 노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이번에도 여전히 아이는 눈 속 깊숙이 부츠를 박으며 앞뜰을 정복하고 다닐 게 뻔했다. 그러니 부츠를 준비해 두는 것은 눈 오기 전날 필수 중의 필수 준비물이었다.

직장 동료들에게서 모든 눈과 관련된 물품이며 옷가지 등이 지금쯤 이미 모두 동나 있을 거라는 경고를 들은 후라서 데이빗에게 되도록 빨리 가서 준비하라고 했더니 괜한 걱정이라고 픽 웃었다. 서너 시간 후에 데이빗이 전화를 해서는 아이의 부츠를 아무 문제 없이 샀다고 했다. 혹 이미 동이 나고 없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있었던 터라 부츠를 발견했다는 말을 듣고는 안심을 하면서도 거의 오후 세시가 다 되어서 부츠를 살 수 있을 정도면 아마 직장 동료들이 하던 말들은 데이빗의 말대로 괜한 경고였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퇴근을 해서 집에 왔더니 오후 늦게 출근하는 데이빗은 이미 집에 없었고 낮에 사다둔 큰아이의 부츠가 문 바로 앞에서 나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자를 열며 아이에게 내일 눈에서 놀 수 있게 아빠가 부츠를 사 놓으셨다고 말을 했다. 상자를 연 나는 핑크색의 예쁜 그 부츠를 빤히 들여다 보았다. 아무리 봐도 방수가 되는 부츠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집에 들어온 데이빗에게 방수가 되는 것인지 확인하고 산 것이냐고 했더니 방수처럼 보여서 그냥 샀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방수가 아닌것 같다고 했더니 그것도 괜한 걱정이라고 했다.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운동화보단 낫겠지 싶어 다음날 그 의심스러운 부츠를 신겨서 아이를 눈에서 놀게 했다. 한두 시간 열심히 놀았을까? 나는 문앞에서부터 좁다랗게 눈삽을 이용해서 미리 파놓은 길 위에 서서 멀찍이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점점 추위를 참을 수가 없어져서 아이들에게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했다.

아이들을 집으로 들이는 작업도 아이들을 이것저것 완벽하게 입혀서 눈 속으로 내보낼 때 맞먹지 않게 복잡했다. 먼저 신발과 옷, 모자에 묻은 눈을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모두 털어야 했다. 집에 들어와서는 코트와 모자, 신발, 스카프를 차례차례 풀고 차가운 손발을 빨리 따뜻하게 덥혀주기 위해 벽난로 앞으로 데리고 왔다. 아이들이 옷을 벗는 것을 도와 주다가 큰아이의 양말을 보고는 나는 거의 기겁을 했다. 양말이 무슨 얼음물에 통째로 담궜다가 건져낸 것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제네바의 발은 빨갛게 부은 채로 젖어 있었는데 아이는 추운 줄도 모르고 그 상태로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놀고 있었던 것일까? 얼른 젖은 양말을 벗기고 마른 수건으로 닦아 준 다음 맛사지를 계속 해주며 벽난로 앞쪽으로 발을 향하고 있으라고 했다. 덜덜 떨고 있는 아이에게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고 나서야 마음이 좀 놓였다. 방수부츠가 아닌 그냥 털부츠를 방수부츠라고 ‘믿고’ 사온 데이빗의 ‘대강대강 정신’이 원망스러워서 한마디 이미 던진 후였다. 모든 눈부츠는 다 팔리고 방수가 안되는 털부츠니까 늦은 시간에도 살 수 있었던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니 이제 와서 원망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아이는 나름대로 즐겁게 놀지 않았나. 좀 있다 짬이 나면 월마트 가서 눈부츠 하나를 사오지 뭐(혹 운좋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물론 아이의 발은 금방 녹았고, 그 때 산 털부츠는 날씨가 추울 때 운동화 대신 신고 다니는 꼭 필요한 물건이 되었다. 옷이나 신발에 까다로운 큰아이도 그 부츠는 정말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 털부츠를 신고 눈 속에서 발이 젖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놀았던 것이나, 흠뻑 젖은 발을 따스한 불 앞에서 녹이며 핫 초콜렛 (hot chocolate)을 마셨던 것, 혼비백산이 된 엄마의 과장된 부산을 보고 웃었던 것 들이 모두 아이가 두고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억 거리가 될 것 같기도 했다.

꼭 모든 조건이 완벽해야만 좋은 추억이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닌 거였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어쩌면 더 재밌는 말거리가 생기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따뜻한 털부츠를 겨울 내내 신게 됐으니 그것도 덤으로 얻은 이익인 셈이다. 방수부츠가 아니라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췄더라면 추억감을 만들 수 있는 오랜만에 온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을 아쉬워 하며 울적한 오후를 보내야 했을 텐데,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니 실보다는 득이 더 많았던 것이다. 흐뭇함을 느끼며 따뜻한 핫 초콜렛의 향이 이끄는 대로 지긋이 눈을 감은 채 눈오는 날의 포근함 속으로 빠져 들었다.

/김성희(볼티모어 한인장로교회의 집사이자 요한전도회 문서부장.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메릴랜드 주립대학 의과대학에서 연구 행정원으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