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돌아오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어김없이 연극이나 영화 등으로 재창조되는 크리스마스 고전. 영국 작가 찰스 디킨즈의 ‘크리스마스 철학’을 담은 수전노(守錢奴) 스크루지 영감의 시간여행.
찰스 디킨즈의 고전 <크리스마스 캐롤>이 디즈니에 의해 3D디지털기술 판타지 블록버스터로 다시 태어났다. 고전의 이야기를 충실히 담고 재현해낸 과학기술에 놀라는 한편, 돈을 숭배하던 스크루지가 점점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천하의 구두쇠 에비니저 스크루지 (짐 캐리)는 올해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자신의 충직한 직원 밥(게리 올드먼)과 쾌활한 조카 프레드(콜린 퍼스)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는다.
그날 밤, 그의 앞에 7년 전에 죽은 동업자 말리의 유령이 나타난다. 생전에 스크루지만큼 인색하게 살았던 벌로 유령이 되어 끔찍한 형벌을 받고 있는 말리는 스크루지가 자신과 같은 운명에 처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
그는 스크루지에게 세 명의 혼령이 찾아올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 이후 말리의 이야기대로 과거, 현재, 미래의 세 혼령이 찾아와 스크루지에게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을 보여준다. 그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었고, 현재에는 어떻게 살고 있고 또 미래엔 어떻게 죽게 될 것인지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결론은 뻔하다. 스크루지 영감은 그동안 가진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개과천선한다.
그러나 오직 돈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스크루지를 함부로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또한 가진 것을 쉽게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으며, 재능이나 혹은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타락한 인간 안에는 나누며 살지 못하는 고립된 자아가 분명히 누구에게나 있다.
나누지 못하기에 참으로 무겁게 살아간다. 스크루지에게 유령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던 친구 말리의 영혼은 무거운 쇠사슬에 갇혀 있었다. 애니메이션에는 속세에 찌든 영혼들이 평소 나누고 살지 못했던 무거운 짐을 지고 형벌을 받고 있는 모습을 적나라하면서도 괴기스럽게 묘사해 무서울 정도다.
디킨즈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디킨즈는 어린 시절 자본주의가 발흥기에 접어들던 19세기 전반에 영국 대도시의 번영에 숨겨진 무서운 빈곤과 비인도적인 노동의 어두운 면을 체험했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을 직접 체험한 그는 <올리버 트위스트> 등의 작품을 통해 이러한 사회상을 비판한 바 있다. 이 소설 역시 그러한 디킨즈의 생각을 일맥상통하게 반영하는 것일수도 있다. “크리스마스만이라도 가진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나누며 살자”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자세와 철학을 제시하는 셈이다.
매년 돌아오는 크리스마스 시즌, 우리는 어떤 철학과 자세를 갖고 맞이하고 있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지 않나. 물질문화와 향락주의에 젖어 화려한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고 있거나 같이 시간을 보낼 이성친구가 없다며 불평하고 있다면 크리스마스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크리스마스는 캐럴이나 장식, 선물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디킨즈처럼 이웃과의 나눔이나 가족애에 의미를 둘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는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등된 본체를 지니신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고, 비우셔서 이 땅 가운데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날이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인류를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구원자를 보내신 날이다.
크리스마스의 본질적인 의미를 퇴색시키기 위해 사단은 끊임없이 방해공작을 펼친다. 심지어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도 크리스마스에 ‘Merry Christmas’ 대신 ‘Happy Holiday’라고 인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퇴색시키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있지만, 크리스천들은 그 날이 어떤 날인지 기억하고 사수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크리스마스를 20여일 앞두고, 교회 안에서 성탄예배를 드릴 준비를 하고 다양한 성탄절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것도 좋지만 교회 밖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어떤 날인지 분명히 알려주고, 상기시키는 기획들을 구상해보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찰스 디킨즈의 고전 <크리스마스 캐롤>이 디즈니에 의해 3D디지털기술 판타지 블록버스터로 다시 태어났다. 고전의 이야기를 충실히 담고 재현해낸 과학기술에 놀라는 한편, 돈을 숭배하던 스크루지가 점점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천하의 구두쇠 에비니저 스크루지 (짐 캐리)는 올해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자신의 충직한 직원 밥(게리 올드먼)과 쾌활한 조카 프레드(콜린 퍼스)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는다.
그날 밤, 그의 앞에 7년 전에 죽은 동업자 말리의 유령이 나타난다. 생전에 스크루지만큼 인색하게 살았던 벌로 유령이 되어 끔찍한 형벌을 받고 있는 말리는 스크루지가 자신과 같은 운명에 처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
그는 스크루지에게 세 명의 혼령이 찾아올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 이후 말리의 이야기대로 과거, 현재, 미래의 세 혼령이 찾아와 스크루지에게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을 보여준다. 그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었고, 현재에는 어떻게 살고 있고 또 미래엔 어떻게 죽게 될 것인지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결론은 뻔하다. 스크루지 영감은 그동안 가진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개과천선한다.
그러나 오직 돈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스크루지를 함부로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또한 가진 것을 쉽게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으며, 재능이나 혹은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타락한 인간 안에는 나누며 살지 못하는 고립된 자아가 분명히 누구에게나 있다.
나누지 못하기에 참으로 무겁게 살아간다. 스크루지에게 유령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던 친구 말리의 영혼은 무거운 쇠사슬에 갇혀 있었다. 애니메이션에는 속세에 찌든 영혼들이 평소 나누고 살지 못했던 무거운 짐을 지고 형벌을 받고 있는 모습을 적나라하면서도 괴기스럽게 묘사해 무서울 정도다.
▲개과천선한 스크루지 영감. 구두쇠였던 그가 나눔을 실천하는 따뜻한 사람으로 변화됐다. |
매년 돌아오는 크리스마스 시즌, 우리는 어떤 철학과 자세를 갖고 맞이하고 있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지 않나. 물질문화와 향락주의에 젖어 화려한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고 있거나 같이 시간을 보낼 이성친구가 없다며 불평하고 있다면 크리스마스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크리스마스는 캐럴이나 장식, 선물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디킨즈처럼 이웃과의 나눔이나 가족애에 의미를 둘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는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등된 본체를 지니신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고, 비우셔서 이 땅 가운데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날이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인류를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구원자를 보내신 날이다.
크리스마스의 본질적인 의미를 퇴색시키기 위해 사단은 끊임없이 방해공작을 펼친다. 심지어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도 크리스마스에 ‘Merry Christmas’ 대신 ‘Happy Holiday’라고 인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퇴색시키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있지만, 크리스천들은 그 날이 어떤 날인지 기억하고 사수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크리스마스를 20여일 앞두고, 교회 안에서 성탄예배를 드릴 준비를 하고 다양한 성탄절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것도 좋지만 교회 밖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어떤 날인지 분명히 알려주고, 상기시키는 기획들을 구상해보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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