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과 영국의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대단한 관심을 끌었던 사건이 있었다. 아니, 부모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페어(au pair)인 루이스 우드워드(Louise Woodward)와 8개월 된 남아 매슈 이픈(Matthew Eappen)의 사망 사건이다. 의사 부부인 이픈은 8개월된 아이를 위해 소개소를 통해 영국에서 19살 된 우드워드를 가정부로 데리고 왔다.

가정부격인 오페어는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 소개된 집에 와서 계약기간 동안 그 집에 거주하며 집안인을 봐주는 사람이다. 반면에 보모(nanny)는 유모로서 아이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특별히 훈련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우드워드는 아직 10대인 데다가, 아이를 낳아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특별한 훈련도 받지 않은 가정부였다. 하여간 어찌되었든지 간에 매슈는 8개월 반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가 부모 곁을 떠나고 말았다. 이픈 부부는 가정부를 소고했다. 우드워드는 2급 살인 협의를 받고 수감되었다가 279일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러나 결국 우발적인 살인으로 판결 받고 감옥에서 나왔다.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법원 밖에서는 "Don't blame nanny, blame the mother(유모를 비난하지 말고 엄마를 비난하라)"라는 비난의 소리가 난무했다. 이 재판은 한 가정의 비극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일하는 엄마(working mother)에 대한 판결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미국에서 여섯 살 미만의 어린아이를 가진 엄마들의 3분의 2가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모두들 육아는 어떻게 해결하고 나가서 일하는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더러는 할머니나 친척, 베이비 시터가 아이를 돌보고 있고, 혹은 탁아소로 보내진다. 앞의 의사 부부처럼 돌보아줄 사람이 없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은 해외에서 오페어를 데리고 오거나 보모를 알선하는 업체에서 보모를 시간제로 쓰기도 한다. 일하는 엄마들에게 육아란 굉장한 큰 숙제이며 장애물이다. 집안 사정으로 할 수 없이 밖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하는 엄마들도 있지만, 자기 직업의 좀 더 나은 경력을 쌓고자 원해서 육아는 둘째로 제쳐놓고 일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하간 일을 하는 상황은 같지만 그 동기는 다르다.

하루아침에 이픈 부부는 가정생활보다는 오로지 자기 직업을 더 중요시 여겨 갓 태어난 아이를 경험 없는 틴에이저에게 맡겨놓고 밖에 나가 정신적인 보상과 좀 더 큰 집이라는 야망만 추구하는 여피 찌꺼기의 총체라고 라디오와 인터넷을 통해 지탄받게 되었다. 어린것을 아직도 세상에 대한 흥미로 가득한 틴에이저에게 맡기고 나갔을 때 그 부모의 상황이야 오죽했겠냐고 말하면, 어떻게 어린 자식이 값이 싸다는 이유로 'nanny'도 아닌 'au pair'에게 맡기고 자신의 야망을 위해 나갔냐며 분개한다. 사람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도, 매니큐어를 칠하는 것도 자격증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을 채용할 때, 그것도 자기가 낳은 사랑하는 자식을 맡기는 데 어떻게 훈련도 안 된 사람에게 맡겨놓고 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엄마의 실수였다고 꼬집는다. 우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육아에 대한 개념과 특권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육아란 부모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요, 특권이다. 그 특권에는 희생이 따르지만 육아 속에서 얻는 기쁨과 즐거움은 어디서나 흔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완전히 이타적인 존재에서 점차 성장하면서 부모에게 주는 보람과 기쁨, 그리고 그 사랑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또 살 수 없는 귀한 것이다. 부모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부모의 역할은 끊임없는 인내와 사랑이 요구되는 힘든 일이다. 육아의 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커가는 것과 함께 부모 자신도 인격적으로 성숙해진다. 나 역시 그들을 통해 참으로 많은 기쁨을 누린다.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기특하고 신기해하며 아이들에게서 삶의 윤활유를 공급받는다. 이런 육아의 즐거움을 잘 모르고 지나간 부모들, 특히 직업이나 학업 관계로 육아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부모들은 나이가 들어서야 그때 그 시절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돌보는 재미를 못 느끼며 지냈다고 후회들을 한다. 더 나아가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고 한다. 제대로 못해주어서, 혹은 귀찮게만 느꼈던 것이 미안해서.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세 살까지는 인간 성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이며, 대부분의 성격이 생후 3년 사이에 결정된다는 연구 보고를 감안할 때, 이러한 육아의 특권을 부모가 아닌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요 위기이다. 한국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생후 3년간이 사람의 성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임을 안다면 육아에서 부모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다.

엄마 눈과 아이의 눈이 마주칠 때 그 속에는 사랑이 흐르고, 아이는 그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을 먹고 자라게 된다. 영적인 안정감을 느낀다. 어린아이가 어른에게서 애정을 받고 자라나는 것은 그 아이의 자아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적대감이나 무관심 속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되어진 아이는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자아 개념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포근한 엄마 품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건전한 자아상을 형성하게 된다. 엄마가 아기를 돌볼 때 하는 대화나 사랑의 미소, 노랫소리, 포옹이나 뽀뽀 등은 아기와의 상호 교류이기 때문에 품 안에 안겨 있는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게 되고, 풍성한 감정의 교류로 인해 더 없는 안정감을 가지게 된다.

이런 모든 단순한 애정의 행위들은 아기의 자신감을 증가시키는 요소가 된다. 아기의 건강한 자아상은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와 사랑의 보살핌 속에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에 의해 형성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엄마 외에 누가 있겠는가! 이러한 육아를 엄마 외에 다른 사람이 대신할 때 아기에게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차이가 많겠는가! 아이가 어릴 때의 육아는 솔직히 힘들고 귀찮을 때도 있고 짜증이 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아기를 통해 부모가 받는 기쁨과 사랑의 보상은 더없는 것이다.

벽에 낙서가 가득하고 시끄럽고 온 집안에 장난감이 나뒹굴 때도 있지만, 더 이상 아이들의 다툼소리도 벽지에 낙서도 없을 때가 오리라. 우리는 이 귀중한 권리와 특권을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사업이나 명성이나 혹은 얼마 정도의 물질과 바꿈으로 말미암아 후회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집은 기다려줄 수 있고, 값진 금박 그릇들도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자녀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자.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에 그 누구보다도 힘들게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고, 여러 위험과 질시 속에서도 꿋꿋하게 육아를 감당했던 마리아를 생각해 본다. 결코 자신의 이익만을 고집하지 않았고, 자신의 명성도 지위도 괘념치 않았던 그녀의 믿음이 숭고하게 느껴진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마리아는 그 얼마나 큰 육아의 특권을 부여받았는가?

나에게 주신 평생의 한 번의 기회를 감사하자. 어렵다 할지라도 기쁘게, 감사하게 우리에게 내리신 육아의 특권을 누리며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와 지혜를 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