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9월 10일은 71년 전인 1938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할 날이다. 한국에서는 에스더기도운동, 금제단선교회 등이 회개기도회를 여는 등 당시의 과오를 뉘우치는 행사가 열렸다.

일본은 신사를 중심으로 해 천황을 신격화하는 일본 민간종교인 신도로, 한국인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군국주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미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합방 이전부터 신사참배와 신도신앙은 한국에 침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00년대 중반부터 신사의 확대를 꾀했으나 기독교계 사립학교의 반발로 번번이 좌절됐다. 그러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심은 그치지 않고 기독교계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35년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의 대표들이 신사참배를 대거 거부하자 일본은 강경책을 사용해 학교를 폐교하고 참배를 거부한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하기도 했다. 1938년부터는 교회, 노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경찰을 동원해 압력을 가했고 이에 반대할 시 연행, 구속하는 등 압박을 일삼았다. 결국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제27차 총회일인 1938년 9월 10일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결의하고 만 것이다.

교회들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는 종교적 문제가 아닌 사회문화적 문제로 왜곡해 받아들였고 대다수 교단과 교회들이 신사참배에 응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역시 총회에 앞서서, 2월 6일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던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23개 노회 중 17개가 이미 찬성해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개신교에 앞서 1936년에는 가톨릭이 신사참배를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주기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 신앙의 절개를 변치 않은 위대한 선진들이 순교 당하거나 모진 고난을 겪기도 했다.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2백여개 교회가 폐쇄됐고 2천여명이 투옥됐으며 50여명이 순교했다고 전한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후에는 기독교의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며 교단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 반세기를 훨씬 넘은 지금도 기독교 안에는 신사참배의 아픔과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편, 한국교회는 2008년 제주선교 1백주년을 기념해 예장 합동, 통합, 기장, 합신 등 4개 교단이 제주에서 총회를 개최했고, 셋째날인 24일 연합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신사참배 70주년을 맞아 함께 통회의 기도를 드린 바 있다. 이에 앞서서는 기장이 2007년 개신교단 최초로 신사참배를 공식 사과했으며 2008년 삼일절주일을 신사참배 회개주일로 지킨 바 있다. 2006년 1월에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교단의 친일행적을 공론화하고 회개했으며 2007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도 삼일절에 신사참배에 대한 죄책고백선언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