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현재의 아르메니아는 지리적으로는 남으로 이란과 터키, 북으로는 그루지아(Georgia)와 아제르바이잔(Azerbaijan)과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내륙에 위치하며 아라랏산을 끼고 있어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입니다. 그곳이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그곳의 아르메니아인은 오랜 시간동안 주변의 강대국들의 사이에서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선교지로서 관심을 갖게 되는 아르메니아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로마제국의 콘스탄틴황제(Constantinus)가 기독교에 대한 핍박을 금하는 밀란(Milan) 칙령을 내린 313년보다 훨씬 이전인 301년 국가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세계 최초의 나라라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주위의 국가들이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할 때도 아르메니아는 개종을 거부해 나중에는 근방에서는 아르메니아 민족만이 기독교 민족으로 남았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기회만 생기면 아르메니아를 이슬람 국가로 개종하기 위한 이슬람 제국들의 침략이 이어졌습니다.

필자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그곳에서 아르메니안교회가 있으며, 예루살렘에 아르메니안 구역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교회가 예루살렘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5세기 부터입니다. 그리고 19세기에, 그리고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오토만 터키(Ottoman Turish Empire)에 의한 대량학살이 자행되는 동안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역의 아르메니아 교인들의 대량 이민으로 인하 여 이스라엘 지역의 아르메니아 교인들이 늘어났습니다.

15세기경 부터 오토만 제국이 중동지역과 발칸반도 전 지역을 정복하면서 아르메니아도 오토만 터키 제국의 통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벌어지기 전 오토만 제국에는 약 3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15년에 터키 정부가 수립한 정책에 따라 실행된 대학살로 약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고대에 이미 국가를 건설했었으며,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제국에서는 그리스인들 다음으로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관료나 장군, 그리고 고위 성직자로 승진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황제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현재의 에레반(Yerevan)에 성을 건설한 아기스티스 왕(King Argistis)의 우라투(Urartu)와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제국, 알렉산더의 부하인 셀루쿠스(Seleucus)의 시리아, 그리고 로마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428년에 아르메니아를 점령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 의한 조로아스터교(Zoroaster/ 배화교)로의 개종을 강요함으로 인해 451년에 반란이 일어나서 결국은 아르메니아에게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슬람의 아랍제국은 7세기에 아르메니아 북부를 지배했으나 11세기에 비잔틴 제국이 세력을 재확장해왔고 뒤를 이어 투르크(Turk) 제국의 점령을 받았습니다. 12세기말에는 이집트의 맘룩(Mamluks)과 십자군이 지배를 했었습니다. 페르시아와 오토만 터키가 뒤를 이어 아르메니아를 통치했는데 오토만 투르크는 400년이나 아르메니아를 지배했습니다.

현재에도 국민의 대부분이 아르메니아 정교회(Armenia Orthodox Church) 신자인 아르메니아에는 4만개 이상의 오래된 교회와 기념물들이 남아있습니다. 아르메니아, 이집트, 에디오피아, 시리아에 있었던 교회들은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Coucil of Chalcedon)의 결정, 즉 '그리스도의 한 인성 안에 두 본성이 연합되어 있다'는 그리스도의 신인양성론을 거부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반 칼케돈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중심으로한 단성론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