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한국이 기독교 강국이 된 것은 누군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졌기 때문이다. 1832년 조선 땅을 처음 밟은 귀츨라프 선교사를 시작으로 한국을 복음화시키기 위해 유럽, 미국 등지에서 선교사들이 조선을 찾아왔다. 물론 처음에는 성경을 제대로 쥐어주지도 못한 채 추방당했지만 1882년 한미수호조약 체결 이후 조선 땅의 문호는 열리기 시작했고 더불어 기독교 선교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880년 대 말, 1900년 대 초 선교사들은 어떻게 조선에서 복음을 전했을까? 그리고 그들의 활동을 통해 볼 수 있는 조선의 사회상은 어떤 것일까?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세미나가 4일 오후 6시 코리아소사이어티에서 열렸다. 이날 강사로는 도날드 N. 클락 교수가 나섰다. 트리니티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클락 교수는 찰스 A. 클락의 아들이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찰스 A. 클락은 맥코믹 신학교 재학시절 조선 선교사로 지원,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도날드 N. 클락 교수는 어린 시절 조선에서의 경험과 함께 당시 선교사들의 전략과 시대상을 함께 설명해나갔다.
1900년대 초 조선 땅에서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북장로교, 남감리교, 구세군 선교사를 비롯해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등 교파를 초월해 다양한 국적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교가 시작된 지 20여년 만에 다양한 출신의 선교사가 거의 동시에 입국한 나라는 한국 뿐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20대였다. 이들은 '네비우스 정책'에 따라 한국 교회가 자립·자치·자전할 수 있도록 처름부터 한국 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만들어나갔다.
선교사들의 전략은 △교회 개척 △교육 △여성 개화 △어린이 사역 △치유 사역등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들은 당시 조상, 미신 숭배를 비롯해 술, 담배, 아편 등을 근절하는 것과 철저한 주일성수, 십일조를 한국인들에게 가르쳤다. 이와 함께 성경 읽기, 매일 기도, 정직함 등을 가르쳐 올바른 교회 생활을 하도록 지도했다. 또한 문맹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외국 선교사들이 업적 중 하나는 여성을 교육시킨 것이다. 클락 교수는 "당시 여성들은 사회 진출을 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이 여성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교회 안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한 것은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선교사들은 이화학당, 숭실학교를 만들어 여성들에게 고등 교육을 실시했으며, 이 외에도 마을마다 성경 교실, 건강 교실 등을 개설해 한글과 성경, 건강 등 다양한 내용을 여성들에게 가르쳤다. 특히 남자 선교사들이 한국 여성과 접촉하기는 어려운 때였기에 선교사의 부인들이 나서서 이 일을 맡았다. 클락 교수는 "당시 선교사 사모들은 양장 대신 한복을 입고 서양 음식, 성경 등을 가르쳐 주며 한국 여성들과 가까워졌다. 사모들의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클락 교수는 △교회 안에서 사회의 패러다임을 보여준 것 △자치제도를 가르친 것 △일본에 의존하지 않는 근대화를 꾀하도록 한 것 △서방 사회로 외국 유학의 물꼬를 튼 것 등을 꼽았다.
기독교는 격동하는 한국 사회 가운데 자리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33인 중 15인이 기독교인이었으며, 기독교 학교들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교회에서는 '다윗과 골리앗'같은 설교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힘을 주었으며 일본 압제를 공론화 시켰다. 신사참배에도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강한 일본의 압제로 인해 1940년부터 42년까지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바로 항복하자 선교사들은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온 선교사들의 사역은 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함께해야 했다.
참가자들은 강의 후 평양 이남의 복음화, 한국이 기독교를 잘 받아들인데 대한 이유 등 질문에 답하며 강연을 마쳤다.
1880년 대 말, 1900년 대 초 선교사들은 어떻게 조선에서 복음을 전했을까? 그리고 그들의 활동을 통해 볼 수 있는 조선의 사회상은 어떤 것일까?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세미나가 4일 오후 6시 코리아소사이어티에서 열렸다. 이날 강사로는 도날드 N. 클락 교수가 나섰다. 트리니티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클락 교수는 찰스 A. 클락의 아들이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찰스 A. 클락은 맥코믹 신학교 재학시절 조선 선교사로 지원,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도날드 N. 클락 교수는 어린 시절 조선에서의 경험과 함께 당시 선교사들의 전략과 시대상을 함께 설명해나갔다.
1900년대 초 조선 땅에서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북장로교, 남감리교, 구세군 선교사를 비롯해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등 교파를 초월해 다양한 국적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교가 시작된 지 20여년 만에 다양한 출신의 선교사가 거의 동시에 입국한 나라는 한국 뿐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20대였다. 이들은 '네비우스 정책'에 따라 한국 교회가 자립·자치·자전할 수 있도록 처름부터 한국 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만들어나갔다.
▲당시 선교사들은 크리스천 리더들을 기르는 데 힘썼다. | |
선교사들의 전략은 △교회 개척 △교육 △여성 개화 △어린이 사역 △치유 사역등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들은 당시 조상, 미신 숭배를 비롯해 술, 담배, 아편 등을 근절하는 것과 철저한 주일성수, 십일조를 한국인들에게 가르쳤다. 이와 함께 성경 읽기, 매일 기도, 정직함 등을 가르쳐 올바른 교회 생활을 하도록 지도했다. 또한 문맹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한국인들을 치료하고 과학 등 근대 교육을 시켰던 선교사들 | |
▲여성들은 성경공부를 비롯한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근대화 되어갔다. | |
외국 선교사들이 업적 중 하나는 여성을 교육시킨 것이다. 클락 교수는 "당시 여성들은 사회 진출을 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이 여성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교회 안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한 것은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선교사들은 이화학당, 숭실학교를 만들어 여성들에게 고등 교육을 실시했으며, 이 외에도 마을마다 성경 교실, 건강 교실 등을 개설해 한글과 성경, 건강 등 다양한 내용을 여성들에게 가르쳤다. 특히 남자 선교사들이 한국 여성과 접촉하기는 어려운 때였기에 선교사의 부인들이 나서서 이 일을 맡았다. 클락 교수는 "당시 선교사 사모들은 양장 대신 한복을 입고 서양 음식, 성경 등을 가르쳐 주며 한국 여성들과 가까워졌다. 사모들의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다."고 말했다.
▲선교사 사모들, 여성 선교사들은 한국 여성들과 함께 지내며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을 교육시켰다. | |
이와 함께 클락 교수는 △교회 안에서 사회의 패러다임을 보여준 것 △자치제도를 가르친 것 △일본에 의존하지 않는 근대화를 꾀하도록 한 것 △서방 사회로 외국 유학의 물꼬를 튼 것 등을 꼽았다.
기독교는 격동하는 한국 사회 가운데 자리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33인 중 15인이 기독교인이었으며, 기독교 학교들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교회에서는 '다윗과 골리앗'같은 설교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힘을 주었으며 일본 압제를 공론화 시켰다. 신사참배에도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강한 일본의 압제로 인해 1940년부터 42년까지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바로 항복하자 선교사들은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온 선교사들의 사역은 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함께해야 했다.
참가자들은 강의 후 평양 이남의 복음화, 한국이 기독교를 잘 받아들인데 대한 이유 등 질문에 답하며 강연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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