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가 아닌 일반 성도로서 신앙칼럼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겁없는 짓인지 깨닫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감히 이런 기회를 갖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일반 성도들끼리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을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모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작은 감동’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 작은 감동들이 모아져서 ‘큰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드리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지 마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마다 정초가 되면 만나는 사람에게 누구나 던지는 덕담입니다. 때론 별 생각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인사이기도 한 게 이 표현인듯 싶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슨 복을 받으라는 것인지. 그 복을 받아 어쩌라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사려가 없는 듯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게는 심한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말이 바로 이 인사입니다.

제 생각에 이 표현은 유난히 복받을 일들이 없었던 지정학적 위치에서 살다 가신 선조들이 자손들에게 남겨준, 한스러운, 혹은 아주 복스러운 인사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반어적으로 볼 때 이 말은 지지리도 복받을 일이 없었으니 좀 앞으론 잘되거라 혹은 계속 더 잘되거라…하는 의미가 함축되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복의 기준이 무엇인지, 혹은 그 종류가 무엇인지에 따른 학문적, 성경적 고찰은 일단 제껴두고 생각해봅니다. 아무튼 우리는 한자어로는 의미가 다르지만 무더위를 나타내는 표현도 초복, 중복, 말복으로 나누어 이날에도 ‘먹는 복’을 누립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 고래의 전통 산문을 의미하는 상서[尙書]에 언급된 ‘오복’ 중에 우리는 심지어 치아 건강도 그 다섯 가지 중 ‘강녕’에 해당하는 조건으로 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으로 말씀하신 내용에도 우리는 또 ‘복’을 붙여 여덟가지 복, 즉 ‘팔복’이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여덟가지 복의 조건은 듣는 사람 자신의 행운과 안녕을 비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이타적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서 제겐 늘 고민인 것입니다.

이 팔복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하는 사람의 의중인 “좋은 일 많이 생기세요”라는 것과는 의미가 사뭇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선뜻 나누지 못하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새해에 복을 많이 받으려면” 자신이 손해봐야 하는데 “새해에는 좀 힘들어지세요”라는 역설적인 “축복”을 해드릴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흔히 우리가 기도나 설교 중에 혹은 덕담으로 하는 표현인 “축복”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라는 표현의 “축복”말입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준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빌어주신다는 의미는 그 분이 우리에게 복주실 권능과 의지가 없기 때문인 것으로 문자적인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요? “하나님의 복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라고 해야 제대로 된 표현이란 거지요.

그러나, 우리가 누굽니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하나님의 사람들, 혹은 그럴 준비를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이런 우리들에게 “축복”이란 표현은 “넘치는 복”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축복”의 사전적 의미를 무시하고, 이걸 우리의 일상어로 사용하는데 동의합니다. 어차피 표준어라는 것이 “현재”에 “여러 사람이” “모두 통용하는” 말들을 정의하는 것일진데 “복”이면 어떻고 “축복”이면 어떻습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장 2절)”. 이 말씀에 힘입어 독자 여러분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그 복받는 은혜를 마음껏 나누어 드리기 바랍니다.

첫 글을 이렇게 맺습니다. “욕심적인 세상복은 많이 받지 마시고요. 제가 드리는 축복을 많이 받으십시요. 그리고. 그’ 복’을 다른 분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요.” 이 말이 너무 길다면… “복 많이 받아 나누어 주십시요 !”

/트라이밸리장로교회 김홍덕 집사: hordon@semicom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