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 you ready?”

산부인과 의사 Dr. Johnson 이 환자를 내진하기 위해서 여자 Medical Assistant 인 내게 묻는 말이었다. “Yes, Doctor.” 하면서 의사를 따라 들어가서 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대답도 없이 의사 앞을 지나쳤다. 그 이유는 무슨 말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 일은 4년 전에 갓 병원에서 일을 시작한 때이다.

옛말에 시집살이가 힘이 들어도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 하면 시집살이가 끝이 난다는 말이 있다. 남편을 따라 도미한지 17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캘리포니아 땅을 밟은 이후로, 미국 할머니한테서 일주일에 두 번씩 영어를 1년 동안 배웠다. 이사할 때마다 같은 도시에 있는, Junior College 에서 지금까지 영어 한 과목씩 배우고 있다.

하지만 집에서나, 한국사람들 모임에서는 당연히 우리나라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영어가 그다지 빨리 늘지 않는다. 또한 30 평생을 이미 한국어로 굳은 혀는 도대체 쉽게 변하지가 않는다. 한번은 남편한테 농담한 적이 기억난다. “나는 미국 남자하고 당신은 미국 여자하고, 일년만 같이 살아도 영어를 잘 할 수 있겠지?” 어느 순간엔가, 이왕 미국에 살러 온 이상 영어만은 완전하게, 미국사람처럼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한국에서 은행생활 11년, 미국에서 은행생활 3년. 내 삶 속에서는 은행원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녔다. 어느 날 갑자기, 20년 후에 남편과 내가 은퇴한 후의 삶을 상상해 보았다. “돈만 만지던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짧은 머릿속에서는 “간호원”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나서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잊어 버렸다.

5년 전 갑자기 나는 남편의 손에 이끌리어 집 가까이에 있는 직업 사립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우리는 도와주는 카운슬러를 만났고, 영어와 수학 시험을 치러서 합격하면 그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겨우 턱걸이 점수로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40이 넘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미국아이들과 휩쓸려서 공부를 했다.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오직 나의 친구는 두껍고 빨간 거죽으로 된 영한사전과 도서관에 있는 의자 하나였다.

8개월 코스로 된 “To be a Medical Assistant”, 는 마지막 Externship 을 코스로 하고 있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 내가 볼 때, 점수가 잘 나온 학생들은 어디로 실습을 나가야 할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체, 모든 학생들은 Externship Coordinator 를 만나야 된다고 하기에 나도 덩달아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이 내게 묻는 말은 가까운 큰 병원으로 실습을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영어 때문에 하면서 말을 끝내지 못했다. 실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말을 잇기를 이 큰 병원은 우리 학교와 자매결연 학교인데, 40명의 졸업생 중에 5명 추천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명이 부족하기에 내가 추천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결석 한 번 하지 않았고, 종합적인 점수가 모두 90점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감사하다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나는 미국사람 틈에서 영어로 4년 동안 간호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오직 한가지 하나님이 훗날 나를 사용하시기 위해 훈련하신다는 것을. 나의 희망은 한국말로 간호원 공부를 하고 싶다. 서툰 영어로 의학적인 공부를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에,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나는 오늘도 영어 시집살이가 빨리 끝이 나기를 고대하면서 기다린다.

/김태임(김익곤 목사 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