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05년 1월, 캘리포니아를 떠나 이곳 워싱턴으로 올 때 나의 미래는 지극히 불확실한 것이었지만 그런 가운데도 마음은 새로운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지난 10년 반 동안 나의 삶 전체를 쏟아부으며 사역했던 정든 남가주휄로쉽 교회를 떠나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그런 결단을 내린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994년 5월 교회를 개척하여 10년이 지나는 동안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여 장년과 청소년 그리고 영어부 청년들을 합쳐 약 400여명이 출석하는 이민 교회로서는 중형 교회가 되었고, 큰 규모의 성전과 교육관도 마련하여 마음껏 목회사역을 펼치기에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에서 수시로 ‘이것이 아닌데’를 되풀이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처음 부르셨을 때의 그 순수했던 주님을 향한 사랑과 말씀을 사모하는 가난한 심령,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등은 희미해지고, 세월이 갈수록 점점 교회를 운영하는 매니져와 같이 되어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나는 고민하고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50을 넘긴 나이에 아무런 기약이나 보장도 없이 새로운 지역으로 사역지를 옮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불확실한 상황과 여건에도 불구하고 나의 남은 목회를 이렇게 유지해가며 교회를 운영하다가 나이가 들어 은퇴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새로운 주님의 인도를 구하며 40일간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할수록 점점 더 떠나야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마음 속에는 평강과 함께 새로운 사역에 대한 소원이 찾아왔습니다. 작정기도를 마치면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나와 아내는 교회를 사임한 후 미대륙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인 워싱턴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어가는 막내딸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 또한 평상시 배우고 싶었던 워싱턴 지역의 미국 교회에 가서 공부도 하고 사역을 배우기 위해 그곳으로 방향을 정한 것이었습니다. 1년 반 후면 공부를 마치고 그 지역을 떠날 것으로 계획했기 때문에 잠시 머무는 곳이 될 줄 알았던 그곳이 주님께서 예비하신 나의 마지막 목회지가 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워싱턴 근교의 애난데일이란 지역에서 약 40여명의 교우들이 목회자 없이 10개월간을 자기들끼리 모여 예배를 드리던 온누리침례교회에서 주일 설교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집회를 많이 다니고 있던 터라 한 달에 두 세 번 빠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 지역에 머무는 동안 설교목사로 봉사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수락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틈틈이 교회에 나가 설교를 하면서 6개월 정도가 지나자 마음 속에 점점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역을 해가지곤 교회가 제대로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년 후면 손을 놓고 떠나야 하는데 그 때까지 이 교회를 어느 정도 든든히 세워놓아야 하겠다는 목사로서의 책임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셀교회였습니다. 지난 18년간 목회를 해오는 가운데 구역에서 목장으로 목장에서 셀로 교회를 전환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가운데 정립한 액기스를 적용하여 이 교회를 건강한 셀교회로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들 중에서 뽑은 6가정을 데리고 3개월간 셀리더 훈련을 한 후 2005년 10월부터 비록 지극히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었지만 본교회의 셀교회 사역이 정식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매 주 주일 저녁이면(현재는 수요일 저녁에 모임) 셀리더들이 모여서 리더 모임을 갖고, 또 금요일 저녁이면 셀리더들이 모두 가정을 오픈해서 모이는 셀모임을 하면서 우리 모두는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나는 그리 헌신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모두가 스스로 사역에 헌신하며 즐겁게 모임을 갖는 가운데 교회는 조금씩 건강한 모습으로 성장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2006년 6월이 되어 그들과 약속한 1년 반이란 기간이 다 찼을 때, 나는 교회를 그 상태로 놔두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는 어느 정도 셀교회의 모습을 갖추고는 있었고, 약간의 성장도 했지만, 계속되는 집회로 인해 교회를 많이 비우는 주일이 많음으로 인해 교회는 굴곡이 무척 심했고, 아직도 연약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개척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상태로 교회를 떠났다가는 교회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같은 위기감을 느끼며 나는 많은 고뇌와 갈등을 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는 결코 그 교회의 목회자로 정착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풍요로운 교회를 떠나 그렇게 열악한 교회에서 목회자로 정착한다는 것이 아내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갈등으로 인해 행복할 줄 알았던 1년 반의 안식년은 고통과 괴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국 아내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나는 교인들 앞에서 ‘이 교회의 목회자로 남기로 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를 해버렸습니다.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며 우린 2006년 9월부터 온누리드림교회의 목회자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새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난 그 당시 D12 시스템에 관하여 여러 채널을 통해 소문을 들었습니다. 집회차 한국에 나갈 때면 서울에서 많은 목사님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부산으로 집중훈련을 받으러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중에는 가까운 친구 목사님들과 장로님들도 계셨는데 난 그들을 보며, ‘또 한 때 지나가는 유행성 프로그램이겠지’ 하며 지나쳐버리고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분들이 집중훈련을 다녀와서는, ‘풍성한 교회 교인들이 교회 건축을 위해 어떻게 집을 팔아 바쳤으며, 셀리더들은 얼마나 헌신됐는지 그 교회에 뼈를 묻기까지 충성하기로 다짐한 사람들이고, 교인들은 얼마나 순종을 하는지 목사님의 말 한마디에 해운대 앞바다에 뛰어들기까지 한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더욱더 마음을 닫아 걸었습니다.

‘그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그런 것은 한국에서나 통하지 이민 목회에서는 안 통하는 이야기다,’ ‘나도 이민 목회 초창기에 헌신을 강조하다가 피를 본 목사다,’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풍성한 교회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너무도 심성이 얕고 헌신하지 않으려는 미주의 교포들을 상대로 이민 목회를 하면서 나는 많이 지치고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말 한 마디에도 상처받기 쉬운 교인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뛰어들라 하면 전부 옆 교회로 가버릴 것이 분명한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결코 헌신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나쳐버리고 무시해버린 풍성한 교회의 D12 양육시스템이 다시금 눈에 들어온 것은 온누리드림교회의 담임목회자로 헌신하고 난 직후였습니다.

불신자를 전도하여 그들을 셀리더로 키우기까지 건강한 양육 커리큘럼을 교회에 정착시켜야 했습니다. 지난 18년간 목회 생활 가운데 교인들을 믿음으로 키우기 위해 좋다는 프로그램은 모두 갖다가 사용해보았습니다. 또한 목장 사역에서 셀사역으로 전환하면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몇 개의 프로그램들을 짜깁기 하여 셀리더 훈련과정으로 사용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프로그램들도 사용할 때뿐이지 지속적으로 리더를 양성하는 프로세스가 되지 못한채 언제나 시행착오만을 거듭하며 한계에 부닥치곤 했습니다. 더구나 교인들이 전도의 열정이 없는 상태에서 성경공부만 하는 것이 결코 그들의 영적 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하며,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도 한 바퀴 돌고 나면 그 다음엔 끝나버리는 단기적인 것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다시 접한 D12 양육시스템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같았습니다. 이제는 다시금 시행착오를 하지 않고 우리 교회에서 영구적으로 정착시켜 사용할 양육 과정으로 D12 시스템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집중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지난 1년 반 동안의 안식년 기간 동안 한국에 나가서 훈련을 받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집중훈련의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가르칠 수 있다는 원칙을 잘 몰랐던 나는 한국에 나가서 친구 목사인 최재호 목사님에게 3일 정도 개인지도를 받으며 빈 칸에 답을 달아 내 방식대로 가르치고자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당시 뉴욕에 있는 목사님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인하여 뉴욕에서 D12 집중훈련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김성곤 목사님은 바쁜 스케쥴로 인하여 오실 수 있는 상황이 못되고 대신 최재호 목사님이 김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강의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민 목회를 하면서 한국으로 일년에 6번씩이나 나갈 수 없는 나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아시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며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워싱턴에서 5시간의 운전 거리인 뉴욕으로 계속하여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열린 모임에 대한 컨셉이 도저히 머리로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참석한 100여명의 목사님들에게도 공통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민 교회 가운데 매주일 셀모임을 하는 교회는 100교회 중 다섯 교회도 안되는 것이 실제적인 이민 목회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또 열린 모임을 하라는 것이 도저히 우리 형편에 맞지 않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건 한국 교회에서나 하고 우리는 그것을 빼고 나머지만 하기로 했습니다. 전체적인 프로세스로 돌아가는 D12 시스템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상황에다가 현재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좋은 프로그램만을 빼다가 써야겠다는 생각에 제일 먼저 갖다 적용한 것이 새가족 섬김이 사역이었습니다.

집중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45명 정도의 사람들을 뽑아 새가족 섬김이 훈련을 시켰는데 그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2006년 11월 우리는 미국 교회를 빌려서 드리던 주일 예배 장소를 고등학교로 옮겼는데 그 후로 3개월간 방문한 105명의 방문자 중 타지역이나 단 한 차례만의 방문을 목적으로 온 30명을 제외하고, 주변 지역에서 찾아온 75명의 방문자 중 50명이 등록 정착함으로 거의 70%의 정착률이라고 하는 이민 교회로서는 획기적인 정착률을 기록했습니다. 비록 열린 모임부터 시작하지 않고 중간에 뽑아다가 썼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역사하셨습니다. 가장 놀라운 역사는 새가족 섬김이 배정을 담당한 아내 이혜성 사모가 그렇게 싫어하던 이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가족 섬김이를 배정하다보니 새가족과 기존 교인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한 주간 내내 끊임없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2007년 3월에 시작하여 5월에 마친 제 1기 양육의 기쁨은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순간들이었습니다. 첫 주 필수 과정으로 시작한 전인치유수양회에서는 참석자 45명 거의 전원이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헌신을 강조하지 않겠다는 내 인간적인 생각은 첫 시간부터 깨어졌습니다. 양육의 기쁨 교육 첫시간, ‘양육을 받는 12주간 동안은 아프지도 말고 죽지도 말라’고 하는 지침을 나누면서 이 과정을 마치려면 엄청난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나나 배우는 사람들 모두가 뼈 속으로 느껴야 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헌신을 시키지 않아도 교재와 D12 시스템 자체가 자동적으로 헌신의 자리로 인도해주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교인들 모두가 자원하여 그 지침을 따라주었습니다.

등록한 45명 중 아프고 죽을 것같은 5명은 미리 탈락하고 40명의 수료 대상중 1명이 마지막 과를 빠져서 탈락함으로 39명이 수료를 하였습니다. 김목사님이 뉴욕에 오셔서 말씀해주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양육의 기쁨은 잘 달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수료를 시키는 것이 좋은 건데 처음부터 너무 엄격하게 해서 한 명을 탈락시키는 바람에 그 부부가 다 교회를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주에 한 번 하는 교육뿐만이 아니라 매일의 기도생활, 말씀 읽기, 큐티, 교재 공부, 예배와 셀모임 출석등의 전반적인 신앙생활을 다루는 하나님 앞에서를 실천하면서 삶과 가치관이 변화되어져 갔습니다.

마지막 주 나는 그들의 교재를 모두 제출하도록 했는데 그 39권의 교재를 이틀간 점검하며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나는 그만큼의 헌신을 기대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깨알같이 쓰고 또 붙이고 붙여 두꺼워진 교재를 보면서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 나는 이들을 위해 앞으로 나의 남은 생애를 바치겠다’고 눈물로 헌신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헌신시키려 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나를 헌신시킨 것입니다. 제 1기 양육의 기쁨 수료식은 감격의 눈물로 가득한 감동의 수료식이었습니다. 양육의 기쁨을 마친 다음 주 우린 비록 그동안 열린 모임은 안했지만 새생명축제를 열었습니다. 12주간 전도 대상자, 베스트를 선정해서 기도한 결과 100여명의 불신자들과 방문자들이 참여하여 약 40여명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또한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교회에 정착하는 열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작년 9월에는 양육의 기쁨 2기와 세계비전대학의 첫학기인 제자의 삶이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양육의 기쁨에 등록한 47명의 2기생들과 양육의 기쁨 1기를 마친 수료생 전원이 제자의 삶에 동참하여 3개월의 훈련과정을 마친 후 지난 12월 초, 거의 전원이 수료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양육의 기쁨 2기생들은 1기 때보다 더욱 헌신했고, 수료식은 거의 전원이 눈물을 흘리며 간증을 하는 감격의 도가니였습니다. 제자의 삶은 더욱 많은 시간과 노력의 헌신을 요구했지만 단 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모두 최선을 다해 과정을 마치고 수료를 했습니다.

작년 8월, 저희 이민 목회자들이 고대하며 오시기를 바랐던 김성곤 목사님이 바쁜 일정을 쪼개어 미주에 있는 이민 교회와 목회자들을 위한 셀컨퍼런스를 뉴욕에서 개최했습니다. 우리 교회 셀리더들을 한국에까지 데리고 가고 싶었는데 가까운 뉴욕에서 하게 되어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17명의 교역자들과 셀리더들과 함께 참석하여 넘치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말로 100번 설명을 한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실제의 체험이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교회에서 이미 D12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던 고로 우리들은 김목사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모두 피부로 느끼고 마음 속 깊이 깨달으며, 우리의 사역을 새롭게 점검하고 확인할 수 있는 너무도 귀한 기회였습니다.

그 다음에 있었던 열린모임 집중훈련에 나는 다시 12명의 교역자들과 셀리더들을 데리고 참석하여 비로서 열린모임의 컨셉을 이해하고 실천할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열린모임이 왜 중요하며 왜 그것이 D12시스템의 기초가 되는지, 그것을 어떻게 운영하는지에 관한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고는 열린모임에 대한 비전이 가슴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나는 본교회로 돌아와 바로 열린 모임을 시작하고 지도자들을 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시에 시작하게 했습니다. 3월에 시작되는 양육과 훈련과정까지 기다리려면 너무 늦을 것같아 일단 훈련과 함께 실제 열린 모임을 연 것입니다. 현재 12개의 열린 모임이 각처에서 열리고 있고, 한어 청년부에서는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지역의 여러 대학에서 열린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3월이 되어 전체 양육과 훈련이 시작될 때 약 40개 정도의 열린 모임이 동시에 시작되게 될 것입니다.

저희 온누리드림교회는 지난 1년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1년전 학교로 옮겨 예배를 드릴 때 주일에 참석하는 장년 교인은 70명 정도였고, 셀은 8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매주일 300여명의 장년들이 출석하고 있으며 셀은 계속 분가를 거듭하여 25개로 증가했습니다. 지난 6개월 전부터는 거의 예외 없이 매주일 8~10가정이 새로이 방문하고 있으며 그 중 많은 가정들이 등록하여 정착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가정들이 방문하여 등록하지 않은채 교회를 출석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 교회는 등록한 교인들보다 출석하는 교인들의 숫자가 더 많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 획기적인 숫적 성장보다 더욱 감사한 것은 교회가 건강한 모습으로 계속 성장하며 건강한 셀리더들을 양성하고 있고, 그에 따라 셀은 계속해서 분가하며 증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이전의 작은 교회일 때보다도 오히려 교회는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계속하여 성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도 두날개 양육시스템의 각 교재들과 열린모임부터 시작하여 재생산의 삶까지 돌아가는 프로세스를 보면서 김성곤 목사님과 이 모든 과정을 이루기까지 함께 수고하신 모든 분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교회가 이 양육시스템을 사용하여 교인들을 양육하고 훈련하지 못한채 숫자만 늘었더라면 지금 우리 교회는 큰 혼란 속에 있으며 나는 이전보다 더 엄청난 혼란 속에서 갈등하며 방황하고 있을 것임을 생각하며, 정확한 시간에 절묘한 타이밍으로 김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이 탁월한 양육 프로세스를 사용케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이제 우리 온누리드림교회에는 많은 뼈파들이 생겨났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직 양육의 기쁨을 시작하기도 전에 들어오는 대로 뼈파들이 되는 헌신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교인들을 데리고 워싱턴의 포토맥강가로 데리고 나가 강물 속으로 뛰어들라면 들어갈 사람이 교인들 중 절반이 넘을 것같습니다. 우리들의 관계가 사랑과 신뢰로 두터워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는 쓸 데 없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 놀라운 양육과 훈련의 과정 속에서 이제 그들은 목회자의 말에 순종하는 뼈파들로 그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건강한 양육 시스템을 청소년들과 영어부 대학 청년들에게도 적용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미주 땅에서 온갖 세상적인 유혹과 위험 속에서 자라고 있는 청소년들이 강력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성장하여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기 위해 이 강력한 양육 시스템을 그들에게도 적용시켜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을 생산해 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가 더욱 강력한 셀교회로 성장하여 미주의 많은 교회들을 위해 쓰임받게 될 날이 머지 않아 올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많은 은혜와 영적 축복과 좋은 자료들을 그들과 나누며 함께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에 우리는 헌신하려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인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과, 미주의 교포 교회들을 위한 섬김, 그리고 세계선교 비전을 위해 힘차게 달려갈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신 주님께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출처 온누리드림교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