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뱁티스트 프레스는 ‘선거 이후 교회를 위한 다섯 가지 도전’이라는 칼럼을 최근 개재했다.
‘뱁티스트 뉴스 글로벌’ 이사인 마크 윙필드(Mark Wingfield)은 해당 칼럼을 통해 먼저 “세상에서 교회의 증언은 거의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앙의 정치화, 성경적 가르침의 포기, 위선, 진리의 희생, 돈과 지위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들이 교회로 하여금 현대 문화에 대해 말할 타당성과 권위를 잃게 했다”고 진단했다.
윙필드는 미국의 보수주의자, 특히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은 “절대적 진리와 엄격한 도덕성, 특정한 현실에 대해 깊고 열정적인 관심을 가졌었다”면서, 상대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은 “느슨한 도덕성, 성 윤리, 절대적 진리에 대한 의심을 장려한다는 비난을 받은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윙필드는 그러나 오늘날에 “잘못된 정보, 가짜 뉴스, 음모론, 터무니없는 거짓 공세에 맞서 싸우는 것은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이며 “입장이 서로 바뀌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비유했다.
아래는 그가 말하는 ‘대통령 선거 이후’에 미국의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직면할 다섯 가지의 도전이다.
첫째는, 양면주의적 태도(Bothsidesism)를 버릴 것. 평화주의자들의 자연스런 경향은 양쪽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고 고백과 용서를 통해 모든 사람을 중간 지대로 부른다. 이런 태도는 현 상황 속에서는 효과가 없다. 양쪽이 똑같이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느낄 수 있지만, 둘 다 같은 방식이나 같은 악의를 가지고 행동한 것은 아니다. 좋은 부모가 각 자녀를 개별적으로 다뤄야 하듯이, 각각의 측면은 고유한 가치와 행동에 따라 취급되어야 한다. 양면주의적 태도는 이 난국을 벗어나려는 게으르고 비현실적인 방법이다.
둘째는 진실에 대한 존중 회복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쪽은 진실을, 다른 한쪽은 거짓을 믿는 문제가 아니다. 대신에, 양측이 자신의 견해를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경우다.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두 개의 반대되는 생각이 동시에 진실일리가 없다. 어찌됐든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에 대해 합의를 봐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거짓된 세계에서 사는 위험을 보여 주었다. 결국 거짓말은 당신을 죽게 할 것이다. 교회가 거짓에서 진실을 가려내도록 도울 수 없다면, 우리는 사역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셋째, 돈에 대한 사랑 극복하기. 교회에게 이것은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해야 한다. 예수님은 복음서에 기록된 다른 어떤 주제보다 돈에 대해 더 많이 말씀하셨다. 이것을 바로잡으면 다른 모든 성공도 가능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공화당 캠페인 모두에서 개인의 경제적 이익에 호소하는 것을 다른 모든 관심사들보다 우위에 둔다. 우리 사회는 우리가 자신의 경제적 복지에 가장 관심을 갖도록 조종해 놓았다. 돈에 대한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임을 알도록 성경이 우리를 조종해야 한다.
넷째, 공동체 재평가. 교회는 너무나 자주 ‘공동체’를 일종의 강요된 획일성이나 또는 동질성으로 가정했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우리처럼 생각한다고 생각하고, 우리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 무리를 이루는 경향이 있다. 마치 커피숍에서 주고 받는 일요일 아침 인사처럼 얕고 피상적인 공동체를 만들 뿐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노를 건네 받은 모든 사람과 함께 한 배에 있게 한다. 우리는 가라앉지 않고 배의 노를 젓는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본받아야 할 교훈이다. 배에 물이 들어온다고 불평하지 말고 노를 나눠줘야 한다.
다섯째, 이웃 사랑하기. 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던 옛날이 그립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데 동의할 때, 예수님의 명령을 어떻게 시행할 지에 대해 유익한 대화를 할 수 있다. 슬프게도 오늘날의 토론은 다른 영역으로 옮겨갔다: “우리가 그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또는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식이다. 예수님의 기본 가르침을 바로 잡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다른 것들을 치료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