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모세 칼럼 예코임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a) 

은하계에는 별이 2천억 내지 3천억 개가 있다고 한다. 우주에는 그런 은하계가 몇 천억 개가 있는지 인간은 알 수 없다. 계속해서 새로운 은하계가 발견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대폭발(빅뱅)을 통해 생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주는 명백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가만히 묵상해보면 실로 신묘막측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피조물이 유기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시편 19편은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을 하고 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온 세계 끝가지 이르도다"(시 19:2-4a).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시적이거나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다. 규모를 알 수 없는 광활한 우주가 하나님 섭리 안에서 소통하며 유기적으로 움직인다는 표현이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몸과 지구 생태계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생명 활동을 하고 있다. 극미량의 호르몬 변화만 있어도 몸에는 이상 신호가 온다. 눈썹이나 손발톱 같이 지극히 작은 지체들도 건강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몸에 이상이 있거나 외부에서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몸의 모든 기능은 그것을 회복하거나 물리치기 위해 총동원된다. 열이 나는 것은 체온을 높여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해서다. 설사의 경우는 몸에 해로운 음식물을 빨리 몸 밖으로 배출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얼마나 신묘막측한가? 지구 생태계를 보라. 우선 작은 숲을 생각해 보아도 그 숲을 유지하기 위한 유기적 작용이 있다. 숲의 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숲을 보존한다. 예전 미국의 옐로우 스톤에서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늑대를 제거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초식동물들의 번식으로 생태계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는 식물들의 생태계가 파괴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늑대를 풀어놓았더니 생태계가 회복되고 자연이 살아났다고 한다.

이것은 일부 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그 현상만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가이아 이론(Gaia theory)을 만들어냈다. 사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가설(hypothesis)이다. 증명된 것이 아니고 추론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상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저들의 주장과는 달리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다. 

우리의 육체와 지구 생태계와 온 우주가 한 분 창조주의 창조로 이루어졌다. 그 분의 단일성을 참고한다면 이런 유기적인 관계가 모든 피조세계를 섭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창조주의 영광과 권능을 이야기 하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거대담론이다. 

슐라이에르 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년 11월 21일 - 1834년 2월 12일)라는 사람이 신학의 주제는 '인간의 종교적 감정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정통 기독교는 이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람은 현대 자유주의의 창시자라고 부를 만하다.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에 주안점을 두고 신학을 논하는 것을 거대담론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종교 감정'에 주안점을 두고 신학을 논하는 것이 미시담론이다. 마치 거시경제가 세계경제에 기반을 둔 국가전체의 경제를 논하는 것이라면 미시경제는 가계나 개인의 경제를 논하는 것과 같다. 

슐라이에르 마허가 자유주의자로서 정통기독교에서 배척을 받았지만 그가 창시한 신학의 미시담론은 오늘날 기독교 전체를 장악했다. 오늘날 행해지는 설교를 보라. "내가 어떤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위 복음송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시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나의 종교 감정이 이렇다'외에는 선포되는 것이 없다. 

조엘 오스틴의 와이프는 어느 주일 설교 때 조엘 오스틴의 옆에 서서 "우리가 행복해야 하나님도 행복하시다"라는 식의 신성모독적 발언을 했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말했지만 사실은 오늘날 거의 모든 설교가 그런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 노만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 세계 최대 교회의 한국 목사 등을 거쳐 부풀려진 '인간 종교 감정의 신학'이 오늘날 모든 기독교를 잠식한 것이다. 

'초월'에 관한 칼럼에서도 인용했지만 더글라스 웹스터(Douglas D. Webster)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초월에 관한 문제를 다룰 만한 "사고의 카테고리 조차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2차 대전 직후 태어나 지금은 은퇴연령에 다다른 사람들이다. 현대 미국 기독교는 이 사람들의 종교였다. 그런 사람들에게 초월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다는 것은 기독교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은 초월적 관점에서만 이해되고 선포될 수 있다. '인간의 종교 감정'을 연구하는 것은 우상숭배다. 다시 말해서 거대담론이 사라진 미시담론, 즉 내재적인 것만 다루는 종교는 그것이 무엇을 표방하든 우상숭배다. 우상숭배에는 초월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세상에서의 인간의 행복만을 추구한다. '행복 바이러스'니 하는 것들을 주장하는 자들도 이 길을 간다. 

시편은 어찌 보면 미시담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시인들이 자신의 삶의 애환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하나님께 이 땅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시편도 앞에서 인용했듯이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먼저 선포한다. 다시 말해서 우선순위와 주안점과 초점이 창조주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인간이 먼저여서는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제 1문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다.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절대 인간의 행복이 우선되어서는 안 된다. 우선순위로 이야기 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거대담론이 사라진 미시담론이며, 미시담론만 다룰 때 그 종교는 우상숭배가 된다. 

거대담론을 회복하는 '남겨진 자'들이여,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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