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부활 제임스 D. G. 던 | 김경민 역 | 비아 | 144쪽 | 8,000원

구약에서 부활은 굉장히 낯선 주제이다. 부활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몇 곳의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드러난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 시절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확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구약에 나타나지 않았던 부활 사상이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제임스 던은 제2성전 시기 중요한 문헌을 마카비 2서에서 찾아낸다. 그곳에 보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우상 숭배 강요에 저항하여 순교한 어떤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가 나온다. 둘째 아들이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2마 9).”

셋째 역시 죽고, 넷째도 굴복하지 않고 고민을 당하며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 역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2마 14).”

이러한 부활에 대한 기대는 나라 잃은 소망 없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 속에서 확인되었던 것이다.

왜 이러한 부활에 대한 유대인의 인식이 중요할까? 그것은 예수의 부활 이후 부활을 부정하는 또 다른 소문과 이론들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마태에 의하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덤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돈을 주어 제자들이 도둑질해 갔다는 거짓말을 퍼트리게 한다(마 28:11-15). 가짜 뉴스는 어제오늘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피를 토하듯 열정적으로 부활을 주장한다. 그곳에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을 소개하며, 심지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고전 15:8)’ 보이셨다고 말한다.

부활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쉽게 믿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부활에 대한 불신은 2천 년 전 사건으로만 제한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기독교인 아니라 일반인들은 부활을 신화로 평가절하(平價切下)하지 않는가.

이 책의 시작은 바로 그 의혹과 평가절하에서 시작한다. 던은 책의 제목을 ‘Why Believe in Jesus´ Resurrection?’으로 정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예수의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이 역사적 사건으로도 어느 정도 입증 가능함을 증명해 나간다.

서론과 1장은 부활에 대한 개요와 서론 역할을 한다. 2장부터 4장까지는 본론에 해당하며 몇 가지의 사실과 논리를 통해 부활을 논증한다.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곳은 바로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저자의 주장을 책의 논지를 따라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급속하고 빠르게 전파되었던 부활

복음서 모두는 부활을 중요하게 다룬다. 다른 이적이나 사건들이 혼돈스럽게 섞여 있지만, 부활만은 가장 마지막 부분에 위치한다. 어쩌면 부활은 모든 사건들의 결론이자 목적인지도 모른다.

던은 1장에서 부활 당시 장면을 목격했던 시간으로부터 출발한다. 먼저 바울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에 분개하며 그들을 잡아들인다. 그러는 도중,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된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도행전인데, 누가는 바울이 전한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무려 세 번에 걸쳐 자세하게 서술하며 강조한다(행 9:3, 22:6-11, 26:13). 부활하신 예수와 만남은 바울의 사고 체계의 전화를 가져왔고, 소명의 시작점이었다.

던의 주장은 이것이다. 먼저 바울은 바리새인이었고, 부활을 전하는 자들에게 적대적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한 지성이었다. 이러한 충분한 이유들로 갑자기 자신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이나 억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던의 주장에 덧붙여, 필자는 한 가지를 더 말하고 싶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지만, 대제사장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다메섹으로 갈 때 ‘대제사장에게 가서(행 9:1)’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했다.

즉 그는 철저하게 부활을 부정하며, 부활을 주장하는 기독교 신자들을 혐오했다.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이었음에도, 부활을 부정하며 로마와 결탁한 대제사장과 기꺼이 손을 잡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부활 사건 직후 부활 소문들이 급속하게 번져 나갔다는 것을 말해주며, 기독교인 전체가 부활을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던은 성급히 결론내리지 말고 다른 증거들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좋다. 다른 증거들은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자.

천군천사 부활 증언자들, 그들은 왜 다르게 증언하는가?
던은 2장에서 초기 증언자들의 불일치를 면밀히 따져본다. 3장에서는 그 증언들의 차이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본론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빈 무덤 전승’이 갖는 의미를 역사적 사건 속에서 찾아낸다.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사실 자체보다 ‘증언’에 집중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다. 문서적인 최초의 부활 증언은 복음서나 사도행전이 아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대부분 기원후 80년대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약에서 가장 최초로 쓰인 문헌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부활을 강하게 변론하는 고린도전서는 50년대 중반에 기록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강력하게 예수의 부활을 변증하며,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못 박는다. 던은 바울이 사용한 ‘종말로(에스카토)’라는 단어를 통해, 그가 부활에 대한 최종 증언이라고 추측한다.

즉 바울은 이전의 수많은 부활 증언을 알았고, 자신 또한 부활한 예수를 만남으로 부활 증언에 마지막으로 가담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바울의 증언은 결국 부활의 증언들이 자기보다 오래 되었으며, 사도들에 의해 기독교 전반에 가르쳐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기이하게도 복음서의 부활 증언은 서로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으로 돌아가 보면, 부활 당시 예수는 나타나지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가 무덤에 찾아가 천사들을 만난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은 후에 ‘예수께서 지시하신(마 28:16)’ 갈릴리의 어느 산에서 제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승천 이야기 없이 마태복음은 끝이 난다.

누가복음에서도 전반적인 증언은 동일하나, 엠마오로 내려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과 동행하는 장면이 첨가된다.

유일하게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예수를 보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요 20:11-18). 또한 어떤 복음서보다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심지어 21장에서는 갈릴리로 되돌아간 제자들을 만나 베드로에게 사명을 회복시키는 이야기를 부록처럼 첨부한다.

여인들의 증언, 과연 믿을 만한가?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복음서 저자들과 수신자들은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던은 여기서 몇 가지 의미심장한 추론을 시작한다. 먼저는 여성들의 증언이 ‘증언의 가치와 무게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44쪽)’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여성을 배치했을까? 던은 바울서신서에서는 여성들이 사라지고 베드로의 증언이 앞선 것을 목격한다. 그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렇게 추측한다.

“아마도 이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그녀들의 증언을 채택하여 교회 밖의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다기보다는, 교회 공동체가 그녀들의 증언을 인정하고 기념할 준비를 마쳤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46쪽).”

여인들의 증언은 그리 무시할 만한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서신에서 등장하지 않는 여인들의 목격담이 후대에 기록된 복음서들 안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대부분 사도들이 죽거나 순교한 후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할 중요한 시기가 왔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 분명하다. 당대 사회적으로 볼 때 여인들은 무시당하거나 증언은 채택되기 힘든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의 증언을 앞세운 것은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던은 빈 무덤의 전승에 집중하며 결국 부활의 역사성을 확보한다. 필자는 나아가 여성들의 위치를 찾아보았다.

리처드 보컴은 필자가 예상했던 추측을 확증시켜 주었다. 후대에 신빙성을 인정받기 힘든 여성들의 증언을 가장 중요한 부활 사건의 목격자로 채택한 것은, 그녀들의 기원 때문이다.

즉 그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초기 공생애부터 함께 했던 제자들인 것이다.

누가는 갈릴리 초기 사역에서 열두 제자 외에 이름을 밝히지 않는 많은 여성들을 소개한다. 그런데 이곳에 분명하게 이름이 등장하는 여인은 요한이 부활의 증언으로 채택한 ‘막달라 마리아(눅 8:2, 요 20:1)’이다. 그 외에도 다른 여자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심지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그곳을 지킨 사람들은 다름 아닌 여인들이었고, 막달라 마리아도 등장한다(막 15:40, 요 19:25). 초대교회 안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적지 않은 여인들은 열두 사도들에 버금가는 중요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리처드 보컴은 이러한 추측 가능한 전제를 통해 누가가 여인들을 통해 전승의 일부를 입수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부활, 우리에게 남겨진 삶이라는 현장

던은 결론에서 부활 신앙은 ‘죽음을 초월한 삶으로의 부활에 대한 믿음(98쪽)’으로 정의한다. 부활을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들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증인들이 적지 않다. 기자였던 프랭크 모리슨은 예수 부활 신화를 박살내기 위해 역사적 부활 사건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부활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한다면 기독교를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신실한 크리스천’이란 전혀 새로운 곳이었다.

리 스트로벨은 어떤가? 그 역시 신화 속에 갇혀 사는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활 사건으로 탐험을 떠났지만, <예수는 역사다>라는 책을 들고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았던가?

던은 마지막으로 부활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렇다 부활은 사건이 아니라 삶으로 재현되어야 할 생명이다.

정현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