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 동네에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그들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그 발을 씻겼던 여인이었다. 나사로가 죽게 되자 그들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평소 올 수 있는 시간보다 이틀이나 지체해서야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게 된다. 과연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정을 사랑했을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다 지방으로 제자들에게 가자고 하셨을 때도 제자들이 말리고 또한 다른 사람도 아닌 사랑하는 나사로를 고쳐 주러 가는데 왜 늦장을 부리시는지 제자들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의도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아마도 예수님은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 같다. 나사로가 죽고 두 자매가 실망에 빠져있을 때 주님이 도착하신다. 그리고는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 얘기하자,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 대답하게 된다. 이때 예수님이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질문을 던지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그러자 마르다는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한다.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7절).
코칭은 특별한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다. 현재의 단계에서 목표지향적인 대화를 기반으로 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먼저 수행되어야 한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있을 때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으며 동시에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뢰의 관계 속에서 거하게 될 때 서로 격려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또한 서로를 세워 줄 수가 있다. 코칭의 관계가 바로 이러한 '신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대화의 과정인 것이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절대로 권위적인 모습도 아니었고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늘 솔직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셨다. 이처럼 코칭에서도 코치와 피코치의 관계는 예수님이 보이신 '솔직' 과 '존중' 이라는 가치가 인정될 때 그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그는 이러한 관계의 중요성을 요구하는 코칭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면서 '신뢰쌓기'를 시작하게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장모를 위한 치유의 시간을 보내고 또한 후에는 베드로의 배를 설교 플랫폼으로 쓰시기도 하신다. 이렇게 충분히 '신뢰쌓기'를 진행하신 뒤, 주님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소그룹 코칭을 시작하시며 마침내 베드로의 인생에 비전을 던지시게 된다. 그리고 베드로는 마태복음 16:16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뜨거운 고백을 하게 되며, 예수님께서는 그의 영적코치로서 곧바로 베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위로하시는 말씀을 던지신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 코칭의 핵심이다. 자신의 인생가운데서 삶의 목표를 상실하고 표류하고 있을 때, 인생 최고의 코치이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불러 세우시고 그와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 뒤,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하시고 적극적으로 그의 시선을 미래지향적으로 바꾸어 주면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도록 돕는 네비게이션과 같은 역할을 하신 것이다. 이는 또한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동안에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확립해야 함을 언급하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험한 세상에 대해 승리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비록 겉사람의 모습이 연약하고 초라할지라도, 속사람과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된다면 이 세상을 이기고도 남을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진실로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베드로와 마르다처럼 당신도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