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현 교수의 <종교신학 강의> 를 막 다 읽었습니다. 제목대로 종교신학(배타주의-포괄주의-다원주의)을 강의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는 '무서운' 책입니다만, '머리를 망치로 내리치며' 우리가 가진 '신앙'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통찰력 넘치는 책이기도 하네요.

특히 '자기동일성'에서 '구성적 상대성'으로의 전환을 주장하며 종교 간 대화를 강조하는 종교신학자 레이문도 파니카의 견해에 눈길이 갑니다. 파니카는 종교간 대화의 규칙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개종이라는 도전에도 직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개종 불가라는 틀에 묶인 채 기계적으로 자신이 소속된 종교에 투신하는 것을 참된 신앙으로 보기 어려우며 ...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 우리는 새롭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믿어서 잘 간직하고 있는 신 관념을 고수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믿게" 된다는 것이지요.

파니카는 "개종 가능성을 전제할 때 우리는 매일 새롭게 자신의 신앙을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책임을 짊어지게 되며 ... 따라서 개종 가능성은 우리의 믿음을 참되고 살아있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파니카의 견해는 흥미롭게도 제가 '인생 책' 중 한 권으로 삼고 있는 <오픈 시크릿>에서 "그리스도인이 타종교인과 대화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깊이 헌신한 자로서 다른 종교에 헌신하는 이웃과 만나는 것이지만 ...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곳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업적의 꼭대기가 아니고 밑바닥이기에 그리스도인들 역시 다른 종교를 믿는 신자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아야만 한다.

타종교와의 대화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결과 자신에게 심대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위험을 인식해야 하며, 동시에 성령께서 대화를 이용해서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도록 회심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또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나의 기독교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길이며, 이런 위험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소 교회는 세상을 향한 증인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강조했던 레슬리 뉴비긴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아직도 위대한 선교의 세기였지만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기이기도 했던 19세기적 관점이라 할 수 있는 '전제주의'의 틀에 갇힌 공격적이고 일방적인 선교관이 다수를 점하는 한국 기독교의 상황에서, 파니카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원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지 깊이 숙고했던 지난 세기의 위대한 선교사요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의 빛나는 통찰은 훨씬 더 많이 주목받을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오픈 시크릿
레슬리 뉴비긴 | 홍병룡 역 | 복있는사람 | 324쪽 | 16,000원

1. 영어로 '선교신학 입문(An Introduction of Theology of Mission)'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선교적 교회론(Missional Church) 논의와 관련해 요즘 복음주의권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위대한 선교사이자 선교신학자였던 '보수적 WCC' 레슬리 뉴비긴의 선교관이 잘 집약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뉴비긴은 그다지 친절한 저자는 아닌 것 같네요. 압축적인 문장으로 치밀하게 논증을 전개해 나가는 그의 글들은 읽기에도 이해하기에도 그다지 편안하지 않습니다.

2. 저자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무슨 권리로 모든 민족 가운데 예수를 주님으로 전파하느냐고 묻는다면, '예수의 이름으로'가 그 대답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란 파생된 권위가 아닌 궁극적인 권위이기에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더 높은 권위가 존재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이란 또 다른 헌신의 관점에 입각해서는 증명할 수 없는 궁극적인 신앙에 대한 개인적 헌신이자 고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궁극적인 권위이신 예수님께 부름을 받고 모든 사람을 위해 보냄을 받은 그분의 종이요 전달자일 뿐이며, 그 예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맡은 과제라고 강조합니다.

3.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자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성자이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증거합니다. 즉 예수는 열방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달하는 전달자가 되도록 아버지의 보냄을 받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이며 ①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으로서의 선교(행동하는 믿음) ②아들의 삶에 동참하는 것으로서의 선교(행동하는 사랑) ③성령의 증언을 전달하는 것으로서의 선교(행동하는 소망) 등 세 가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4. 이 관점에 따르면, ①선교란 만물을 다스리는 성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선포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세계 역사를 창조하실 때 시작하신 모든 임무를 완수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복음전파와 인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믿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②교회는 모든 인류를 향해 교회가 성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에 연합하여 얻게 된 그 생명 속에 감춰진 하나님 나라의 현존의 비밀에 동참하자고 초대함으로서 기꺼이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③교회는 설령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성령이 이끄는 대로 순종하여 따라감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인 성령의 임재에 의해 주어진 소망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성령이야말로 선교의 여정에서 교회보다 앞서 가는 증인이시며 교회는 그 증언을 경청하는 종의 입장에 있을 뿐입니다.

5. 저자는 인간은 영적 단일체가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인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반영하는 존재로 오직 다른 사람들 및 피조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에, 인간에게 상호관계성을 떠난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반드시 우리가 타인을 초대하는 행위를 통해 이웃으로부터 와야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먼저 선택을 받고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아 다른 누군가에게 구원의 말씀을 들고 가야만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방식이 실제 인간들에게 전달되려면, 성경이 말하는 선택이라는 경로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뉴비긴은 이러한 선택이 안위와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닌 고난과 굴욕을 위한 것이며, 만국의 지배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고 만국을 위해 주님의 종과 증인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6. 저자에 의하면 신앙과 순종은 분리될 수 없으며, 선교 사역은 복음선포를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행동으로부터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구원을 역사 속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해방의 행위와 동일시하고, 진리는 이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해방신학의 견해에 대해서는(참된 신학이 실천행위의 맥락에서만 정립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이 이론이 인식론적 틀로서 마르크스의 사회 분석을 차용함으로서 성경이 말하는 죄와 죽음의 사실을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합니다.

저자에 의하면 구조 개혁을 위해 일하고 때로 악마적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병자를 돌보고 굶주린 자를 먹이는 것만큼이나 선교의 일부일 수 있지만, 그것이 교회 선교의 전부는 아니며 역사 속의 하나님 공동체는 하나님의 질서가 역사 내에서 수립되는 데 사용될 직접적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고난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합니다.

교회는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억압하는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도록 촉구해야 하며, 그 헌신이 세례를 통해 표현되고 성찬을 통해 지속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7. 저자는 회심하고 예수를 따르며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라고 초대하는 일이 언제나 선교의 핵심이어야 한다는 맥가브란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①교회의 수적 성장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동일시하거나 ②제자삼는 것이 우선이며 온전케 하는 일은 그 다음이라는 교회성장학의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저자에 의하면 회심은 전인과 관련된 사건이기에, 회심과 순종의 분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회심의 윤리적 기준을 결정하는 권한을 복음을 위탁받은 교회나 선교사가 가지게 되면, 교회가 죄인들을 향한 풍성한 은혜의 확신으로 충만하기보다, 딱딱한 독단주의로 가득 차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레슬리 알렌을 따라, 선교사가 일하는 어느 곳에서든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배우고 그것에서 성장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춘 살아있는 교회가 탄생하면 그 선교사의 과업은 완수되는 것이며, 그 후로는 선교단체의 윤리적 기준을 어린 교회에 부과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양심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8. 복음전도자가 성경을 수용자 공동체의 언어로 번역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주게 되면, 그 때부터 성경이 그 부족의 전통문화와 선교사들이 전해 준 기독교 모두를 겨냥한 독자적인 비판의 근거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 결과 ①전통문화 ②선교사의 기독교 ③성경을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관계가 형성돼, 수용자 공동체의 문화와 선교사의 문화 모두가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겪게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따라서 저자는 특정 형태의 문화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종족집단 전도(집단개종)의 원리는 역사적으로 순진하고 신학적으로도 용납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문화를 그대로 용납하기보다는 새롭게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9. 저자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신앙을 가진 친구와 이웃을 만날 때, 궁극적인 권위를 지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한 자로서 다른 권위에 헌신한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며, 타종교인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알고 또 선언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처럼 주제넘게 억측하는 것을 멈추고, 먼저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반기고, 그들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 사역의 증거를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가장 고상한 영적 대표자들의 가장 신성한 기초를 위협하는 자로 세상에 오셨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종교가 스스로 구원의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무효화하는 증거로 우뚝 서 있다고 강조합니다.

10.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곳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업적의 꼭대기가 아니고 밑바닥이기에, 그리스도인들 역시 다른 종교를 믿는 신자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타종교와의 대화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결과 자신에게 심대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위험을 인식해야 하며, 동시에 성령께서 대화를 이용해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도록 회심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또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나의 기독교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길이며, 이런 위험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소 교회는 세상을 향한 증인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11. 조금만 편안하게 책을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 외에, 이 위대한 선교사요 현자(賢者)의 멋진 이야기에 내가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저자가 인용하는 책이나 개념들이 낮설지도 않거니와, 겨우(?) 300쪽을 좀 넘는 이 크지 않은 책을 읽고 소화하는 데 2주 가까운 시간이 걸렸으니, 뉴비긴은 정말 나에게는 힘든 숙제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정한욱 원장(우리안과, 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