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제37회 신촌포럼이 '다시 초심으로(Ad Fontes!)'라는 주제로 19일 오전 서울 신촌성결교회(담임 박노훈 목사) 아천홀에서 개최됐다.
포럼에 앞서 개회사를 전한 이정익 목사(신촌포럼 대표, 신촌성결교회 원로)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올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들을 다루고자 한다"며 "500년 전 중세 교회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늘 그때 상황을 오늘에 비유해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오늘도 500년 전 상황과 너무 흡사하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종교적·영적으로 본질에서 너무 이탈한 한국교회를 돌아보면, 오늘날 제2의 종교개혁 필요성을 절감한다"며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시대적·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대안으로 현실 세계에 던지는 의미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고 전했다.
그는 "'종교개혁은 완전했는가? 그것이 최선이었다는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종교개혁을 또 개혁할 부분은 없을까?' 하는 의문들을 늘 갖고 있었다. 향후 500년을 내다보면서 가야 할 길을 확인하고, 아니다 싶으면 유턴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그 동안 신촌포럼은 잔잔한 한국 교계에 돌을 던져서 출렁거리고 되새기게 하고 돌아보게 해 왔다.. 여러 위원들이 수고해서 이 자리가 마련됐다"고 덧붙였다.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의 시작
이날 포럼에서는 이말테 교수(Dr. Malte Rhinow, 루터대)가 '종교개혁 500주년의 역사적 의미', 민경배 석좌교수(백석대)가 '현대 교회를 위한 종교개혁의 의의'를 각각 발표했다.
이말테 교수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으나,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의견이 다양하다"며 "2015년 NCCK는 한국교회의 위기가 교회 본질의 상실 때문이라고 선언했는데,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종교개혁으로부터 배울 만한 점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적 발견이란, 정의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칭의를 주시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해 주신다"며 "예수가 죄값을 내심으로 우리가 자유를 받는 것이다. 죄인이지만 무죄 선언을 받는 것이다. 인간이 구원을 얻도록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설명했다.
또 "루터가 로마서 3장 22-24절의 의미를 재발견했기 때문에, 천주교회 지도자들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당시 교회가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감춘 대신, 사람들이 최후의 심판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쳤다. 사제들은 선행을 요구했다. 그래서 새로운 성서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 성서학 교육과정을 개혁했다"고 했다.
그는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학문적 논쟁을 원했기에 95개 논제를 작성했다. 논쟁을 위한 초청장과 95개 논제를 그 지역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냈다. 1517년 10월 31일 두 가지 다 교회 문에다 붙였을 가능성도 있다"며 "1518년 봄 루터는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들과 논쟁할 기회를 얻었다. 95개 논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에 대한 논쟁이었다. 루터는 영광의 신학을 공격했다. 한국교회가 오랫동안 선언했던 기복신앙도 번영의 신학이며 영광의 신학이기에, 그 논쟁이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말테 교수는 "요하네스 에크(Johannes Eck)의 강력한 공격으로 루터의 천주교회 비판이 더 강해졌다. 루터는 여러 논점들에서 존 위클리프(John Wicliff)와 얀 후스(Jan Hus)의 편에 서게 됐다. 둘 다 파문당했기 때문에 루터는 살아남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며 "루터는 교회의 최고 권위가 교황이나 공의회에 있지 않고 성경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 천주교회의 사제 중심과 위계질서를 반대했고, 1년만에 만인사제직(만인제사장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경 해석을 위한 규칙을 세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론과 3가지 솔라(sola gratia, sola fide, sola Christus)가 성경의 핵심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특징
이후에는 16세기 종교개혁의 특징에 대해 살폈다. 그는 "루터의 면죄부 비판은 교회 전통의 아주 작은 부분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재정·권력과 관계 있는 문제였기에 교회 지도층의 반응이 매우 강했다"며 "루터는 진리에 대한 논쟁을 원했지만 교회 지도층은 힘겨루기를 시작했고, 루터가 교황청의 압박에 저항했기 때문에 교회 권력과 교권주의를 벗어나려 했던 수많은 군주들과 시민들과 농민들이 루터를 따라가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종교개혁은 루터가 했던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다. 루터가 95개 논제로 결정적인 불씨를 던졌을 뿐"이라며 "루터가 그 종교개혁을 시작했고 지속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줬다는 주장까지 할 수 있겠으나, 루터가 수많은 신자들의 교회에 대한 불만족과, 시민들의 교황청과 주교들의 권력을 통한 압박에 대한 저항력과 독립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면 종교개혁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종교개혁은 교회의 문제점들이라기보다, 교회의 세속화와 본질 상실을 비판함으로 시작됐다. 수많은 문제들은 본질 상실의 결과였다"며 "종교개혁은 교회로부터 시작됐지만, 교회만의 개혁은 아니었다.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에 영향을 줬기에, 종교개혁은 보통 국가로서 독일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사의 현대 이전의 단계로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종교개혁을 '소통의 혁명'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루터의 많은 글들은 저가로 인쇄됐는데, 이는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판 인쇄술 발견으로 가능했다. 그리고 루카스 크라나흐 부자(父子)의 그림들도 종교개혁 사상을 알리고 광고하면서, 모든 교인들이 만인사제로서 성서를 공부하고 가르치고 해석하게 됐고 적극적 교류와 소통이 활발해졌다"고 했다.
'거룩함과 세속의 분단 극복'도 종교개혁의 공헌이다. 그는 "한국교회는 예배를 '주일 공동예배'로 이해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온 삶을 예배로 설명(롬 12:1-2)한다"며 "오늘날 대부분 목사들이 거룩과 세속을 분리하지만, 루터는 사도 바울의 새 예배 해석을 잘 이해하고 성직자와 일반 교인 사이의 삶을 허물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다시 교권주의에 빠져 거룩과 세상을 구약시대와 같이 분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미
마지막으로 이말테 교수는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미'를 발표했다. 먼저 '철학사적 중요성'에 대해 "중세 초기 기독교화로 서구의 철학과 신학이 일치했으나, 중세 후반 '유명론' 학자들이 성서와 교리 내 모순을 발견해 인간이 이성으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신학과 철학이 다시 분리됐다"며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고 철학에 집중해 물질적 세계를 연구하기 시작해, 철학 안에 자연과학이 생기고 나중에 독립적인 자연과학 학과들이 생겨났다. 신학자들도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성이 아닌 명상(중세 신비학)이나 하나님의 계시(종교개혁 사상)를 통해 하나님을 탐구하면서 신학의 위기를 극복했다"고 했다.
둘째는 '성서 강조와 교육 발전'이다. 이 교수는 "루터가 '최고의 권위는 교황과 공의회 대신 성서에 있다'고 주장할 때, 만인사제직도 말해야 했다. 고대 교회부터 성서 해석이 주교들의 권력이었기 때문"이라며 "이를 위해 루터는 당시 90% 이상이던 문맹률을 타개하고자 대중 라틴어 학교 설립을 제안했고, 이것이 나중에 김나지움과 수준별 학교 시스템으로 이어졌다. 루터는 여학생들도 학교에 다니게 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모든 교인들이 성경을 원전으로 읽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성서의 모국어 번역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회중의 예배 참여와 음악 발전'이다. 그는 "중세 서구교회에서는 사제가 미사의 주인공이었으나, 루터는 성직자와 회중 사이의 담을 철거했다. 그래서 루터는 신앙고백과 회중 기도 외에 '찬송'의 중요성을 발견했는데, 이것도 고대 교회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었다"며 "이에 루터는 금지된 악기 사용을 허락하고 직접 찬송 30개를 작곡하면서 회중이 예배에 적극 참여하게 됐다. 루터는 세속 음악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쳐, 하인리히 슈츠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고전 종교음악들을 만들었다"고 했다.
넷째 '성상파괴 금지와 예술'에 관해선 "성상 파괴 주장에 맞서, 루터는 종교개혁 신학사상과 어울리지 않는 일부 성상만 없애야 한다고 했고,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당 성상이 세워졌다"며 "루터의 성상 해석을 통해 그림들은 더 이상 숭배되거나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 모범을 보여주는 것으로 관찰됐고, 오늘의 세속적 그림 개념이 준비되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개인의 존엄성 회복과 민주주의'에 대해선 "루터는 칭의론과 만인사제직을 통해 교인들에게 초기 교회와 고대 교회에 원래 있었던 존엄성을 회복시킴으로써, 각 교인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며 "루터는 일반 직업도 성직자의 직업과 똑같은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모든 올바른 직업을 소명으로 해석하면서 각 개인이 다 귀한 존재가 됐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 나중의 인권을 위한 기초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과언이 아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영향'으로는 "급진적 개혁자들은 '공산주의'를 원했다. 루터도 당시 초기 자본주의를 비판했지만, 강제적 혁명을 원하진 않았고 제3의 대안으로써 그리스도 정신으로 구성되는 형제자매들의 공동체를 원했다. 이것이 나중에 독일 복지사회의 기초가 됐다"며 "루터는 나쁜 행동뿐 아니라 해야 하는 좋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도 10계명 위반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있으면 안 되는 것으로 봤다. 루터는 라이스니히(Leisnig) 시의 헌금함 규칙을 직접 제안해 헌금을 사회복지를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고 했다.
이말테 교수는 논의를 정리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사상사적 영향을 비롯해 사회·문화·정치·경제 등 폭넓은 분야에서 영향을 미쳤다"며 "종교개혁은 이처럼 온 세계의 모습에 영향을 줬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그 영향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