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의 자격을 두고 사회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그 중 가장 먼저 결격 사유로 지칭된 것이 바로 그의 '창조과학회 이사' 이력이다. 창조과학회는 현대 과학이 지금까지 밝혀낸 사실과 그 해설 이론을 다수 부정하며, 자신들의 조사와 이론으로 볼 때, 자연과 우주와 인간에 대한 성서의 진술이 오히려 사실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단체이다.

창조과학회의 주장은 과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내의 수많은 기독교 교단 및 단체가 창조과학회를 지지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핵심 교리, 즉 '원죄'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진화와 진화론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원죄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취하며, 그 첫 쌍의 범죄 이후 인류는 죄와 죽음 가운데 태어나므로 '구원'이 필요하다고 보는 기독교 교리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작 유대교에는 원죄 교리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교리는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됐고, 현대 과학의 도전에 맞서는 교회와 신학자에 의해 어떻게 고수되고 있으며, 또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런 것들을 추적한 책이 바로, 타사 와일리(Tatha Wiley)의 《원죄: 기원, 발전, 의미(Original Sin: Origins, Developments, Contemporary Meanings)》이다. 총 2부, 9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1-4장)는 원죄의 개념 및 교리의 기원과 전통 내에서의 발전을, 2부(5-9장)는 근현대의 학문적 도전에 따라 원죄 교리가 어떻게 탈바꿈했지를 다룬다.

저자는 신약성서로부터 이 논의를 시작한다. 비록 약간 차이는 있지만, 히브리 정경과 신약 정경, 모두는 '악'과 '죄'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와일리는, 창세기 3장은 본래 히브리 정경 저자에게 수많은 불순종 이야기 중 첫 번째 이야기에 불과했다고 지적한다. 즉 창세기 3장 이야기는 출애굽기 32장과 별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창세기 1-3장의 문학 장르는 '신화'로써, 지금도 일어나는 이야기를 과거 이야기처럼 들려줄 뿐이다.

한편 신약 정경에서 아담과 하와는 로마서와 고린전후서에 나타난다. 바울은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단지 아담을 그리스도와 평행시키기 위해, 고린도후서에서는 교회의 질서를 말하기 위해 끌어올 뿐이다. 게다가 초기 기독교는 '타락' 혹은 '최초의 범죄'라는 개념을 천상의 영역에서 일어난 초월적 사건(베드로후서 2장 4절, 유다서 6절)으로 보았다.

따라서 실상 원죄에 관한 개념은 성서에서 명확하게 등장한다기보다 기독교 발생 이후 첫 4세기 동안 발전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5세기에 그 의미를 어느 정도 고정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이전에는 흔히 통용되는 '원죄 교리'가 성서에 있다고 보기에는 모호한 점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죄를 다룰 때 사람들히 가장 많이 오해하는 두 가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오해는 "원죄는 언제나 존재했다" 혹은 "원죄는 성서에서 발견되는 개념이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원죄란 개념은 신약 이후 발전된 개념이다. 두 번째 오해는 "원죄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개발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가 큰 역할을 했으나, 그는 '발전'시킨 것일 뿐이다. 그 이전에도 원죄에 대한 '암시'는 존재했다.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영지주의, 클레멘트, 이레나이우스, 유스티누스, 테르툴라아누스, 오리게네스, 카파도기아 교부들 등을 다루면서, 아우구스티누스 이전 '초기 기독교 저자들'은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엄밀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르다. 그는 도나투스파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가운데 그 사상을 발전시켰고, 주로 키프리아누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소경 디디모스, 익명의 주석가 암브로시아스터 등에 의존했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소위 암브로시아스터의 로마서 5장 12절 주석, 즉  헬라어 원문이 아닌 아담과의 모든 인류의 연대를 전제하는 라틴어 번역에 근거했다는 점이다(헬라어 본문은 '아담처럼,' '아담 안에서' 외에도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지니지만, 라틴어 역본은 '아담 안에서'라는 하나의 뜻만 보여준다).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자세하게 서술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펠라기우스는 자기 주장의 근거 자료로써 초기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초기에는 영혼선재설을 믿었으나, 나중에 신학적 논쟁을 위해 영혼유전설로 선회했음도 논한다.

어쨌든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그리고 카르타고 회의(411-418년)와 오랑게 회의(529년)를 거쳐, 교회의 공식적인 원죄 교리가 체계화되었다. 펠라기우스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이 선택된 이유는 '교회의 역할' 때문이다. 당시 교회는 원죄 교리가 확실하게 주장되어야 그리스도의 구원뿐 아니라 교회의 성례전적 역할(세례)도 '필연'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원죄와 상반되는, 원의(原義·original justice)의 결핍을 원죄로 보는 안셀무스의 견해가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 가운데 유행했고(봉건사회에 적합한 설명이었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와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원죄란 '적극적인 무엇(욕망)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었고, 안셀무스에게는 '있어야 할 무엇이 인간에게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이것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존하여 종합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루터가 등장하여, 교회를 향해 그러한 교리를 교회가 약 1천 년 가까이 이단으로 여기던 펠라기우스와 같다는 식으로 비판했다. 이전까지 신학자들은 욕망을 원죄의 효과 내지는 형벌로 보았으나, 루터는 욕망도 실제 죄(peccatum) 내지 죄책(culpa)이라고 주장했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죄인에 불과한 존재를 '의롭다고 여기신다'. 이러한 역설을 잘 표현한 것이 바로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이에 트리엔트 회의가 루터 및 개신교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개최되었다. 트리엔트 회의는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하여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에서 소집된 것으로, 1545-1563년, 약 18년간 진행됐다. 그러나 정작 트리엔트 회의가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 루터는 사망함으로써, 가톨릭과 개신교간 화해의 기회는 당대에서는 사라지게 됐다. 중요한 것은, 저자는 이런 복잡한 논의나 토론을 심각하게 여긴 종교개혁과 트리엔트 회의를 모두 '중세에 속한 것'이라고 평가한다는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원죄에 대한 근본적 도전은 근대와 더불어 등장했다.

에른스트 카시러의 분석에 따르면, 원죄는 계몽철학자들에게는 '대표적인 공공의 적'이었다. 계몽사상가 다수는 원죄 그 자체를 텅 빈 말로 보았다. 그럼에도 이 원죄를 전혀 새롭게 재해석한 근대의 두 주요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스위스 철학자 루소와 독일 철학자 칸트이다. 이 둘은 모두 교회가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불평등), 도덕적(근본악) 차원에서 인간의 보편적 죄성을 설명했다. 하지만 보다 본격적인 근대의 도전은 이러한 사회적, 철학적, 도덕적 논의가 아니라 '과학적' 논의에서 시작됐다.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라는 책이 출판됐다. 교회는 다윈의 출판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창세기가 인간 기원의 실제 역사가 아니라면, 모든 논의가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출판 1년만에 가톨릭 쾰른 시노드는 소위 인간 혈통 이론(theory of descent)을 거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제1차 바티칸 회의(1869-1870)는 한 쌍의 부부로부터 전 인류가 발생했다는 단일발생설을 선언했다.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는 교서 후마니스 게네리스를 통해 원죄 교리를 공고히 선언했다. 비록 후마니스 게네리스가 과학적 '견해'는 성서의 '진리'에 부합할 때만 인정될 수 있으며 고려될 만한 '견해'에는 다원발생설도 포함된다고 했으나, 사실상 그것은 특정 과학적 입장을 금지한 것이나 다름없다.

1909년 교황청성서위원회(Pontifical Biblical Commission)는 진화론과 비평적 성서 해석을 거부했다. 1994년 작성된 가톨릭교리문답서도 여전히 트리엔트 회의의 원죄 교리를 반복했다(개신교의 입장은 공식적인 것이 없으나, 이 문제 있어서는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인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도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 신학자에게서 이루어졌다. 바로 각각 피엣 슈넨베르크와 라인홀드 니버이다.

슈넨베르크는 원죄 교리가 지시하는 '보편적인 죄성'을 확신했고,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이 히브리 선지자들이 그토록 외치던 사회적 죄를 간과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죄,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가 개인적 실재일 뿐 아니라 사회적 실재라고 생각했다. 슈넨베르크의 주요 개념은 '상황' 혹은 '상황에 놓인 존재'이다. 슈넨베르크의 '상황에 놓인 존재'라는 개념은 아담이 저지른 죄로써의 원죄라기보다, 원죄로 인한 인류의 상태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그는 이러한 소외나 악의 문제가 창세기를 넘어서서 히브리 정경 및 신약 성서 전체에서 골고루 퍼져있음을 발견했다.

한편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선과 악 문제를 사회적 용어인 정의와 불의를 통해 설명하며, 불의 혹은 갈등은 개인 및 집단 이기주의로부터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니버는 타인에 대한 경향성이 선의 근거이며, 자기에 대한 경향성이 악의 근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므로, 단순히 '나'와 '너'의 구분보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종족주의적 구별이나 이기주의가 경험될 수 밖에 없고, 이것을 초기 신학자들이 부르던 '원죄'로 여겼다. 니버에게 창세기 3장은 비록 신화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을 참되게 설명하는 강력한 상징적 표현이자 진리였다.

나아가 저자는 오늘날의 새로운 사조인 '페미니즘 신학'이 다루는 원죄를 소개한다. 페미니즘 신학자들은 신학에 있어 성(gender)의 역할을 특정 범주로 분석하기를 시도한 이들로써, 특히 원죄와 관련해(혹은 페미니즘 신학 그 자체와 관련해) 중요한 인물이 바로 로즈마리 러더포드 류터와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이다. 페미니즘 신학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신학과 그 개념들-신, 은총, 죄, 그리스도, 구속, 신앙, 교회 등-은 모두 '남성의 경험(male experience)'과 '남성의 관심사(male interests)'를 반영했다.

로즈마리 류터는, 인류가 '성차별'이라는 원죄를 생산해 왔으며, 여성을 포함하여 복속(服屬)할 수밖에 없는 모든 자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가부장제'야말로 '악'으로 불려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 신학 원리는 여성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듯한 혹은 그것을 배경으로 하며 남성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성서 본문 역시 신의 계시인가? 페미니즘 신학자들은 단호하게 그것을 거부한다.

실례로 가부장제 영향을 받은 토라는 모든 명령을 '남성'에게 내린다. 남성이 모든 명령을 지키는 주체인 반면, 여성은 아버지, 남편, 아들에게 포함될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초기 추종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예수가 가르친 '바실레이아'는 가부장제와 거리가 멀다. 예수는 실제로 여성을 '아브라함의 딸들'이라 부르며 온전한 그의 제자이자 영적 운동의 협력자로 인정했다.

예수가 그린 '새로운 가족'상에 의하면(막 3:34-35) 하나님만이 아버지이며, 나머지는 모두 가족의 동등한 일원이다. 예수의 비유에서도 여러 번 하나님의 여성성이 등장한다.

더욱이 초기 예수의 제자, 무엇보다 바울의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남성과 여성 간 동등성을 선포하는 최상의 구절이다. 바울의 할례 거절은 앞서 지적한 이스라엘 공동체 혹은 토라 내에서의 남성의 특권을 지우는 역할도 한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성-중립적이며, 심지어 로마서 16장에서 몇몇 여성은 교회 내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디모데전서는 다르다. 그것은 바울의 편지도 아니며 1세기 후반-2세기에 기록된 것이다. 디모데전서로 인해, 남성 신학자들은 하와를 악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 사상이 아니며, 오히려 당대 유행하던 헤시오도스의 판도라 신화처럼 여성을 비하하는 사상에서 등장한 것이다.

페미니즘 신학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신학의 완성을 위해 원죄 교리에 호소하는 일이 발생했고, 그 가운데 가부장적 본문이 수용된 것이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이러한 페미니즘 신학을 통해 성평등을 추구하지만, 여전히 여성에 대한 영적 불평등은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 세계를 포괄적으로 원죄로 해석해 내려 한 가톨릭 신학자를 다룬다. 그의 이름은 버나드 로너간이다. 그는 '방법론적 신학(a methodical theology)'을 주장한다. 그가 주장하는 방법론적 신학은 종래의 형이상학적 신학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형이상학적 신학이 추상적이라면 방법론적 신학은 철저하게 구체적이고 경험적이고 분석적이며, 무엇보다 인간 의식(human consciousness)에 대한 범주화를 그 특징으로 한다.

로너간은 인간에게는 지향성이 존재하며,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혹은 올바르게 인간이 성숙 내지는 발전하기 위해 세 단계의 '회심(conversion)'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바로 지적 회심, 도덕적 회심, 종교적 회심이다. 지적 회심은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도덕적 회심은 올바르게 (가치 등을) 판단하는 것이다. 종교적 회심은 그 너머의 '자기 초월'로써, '신적 신비'(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와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종래의 거룩과 죄성 이라는 추상적인 용어는, 로너간에 의해 사랑과 혐오라는 구체적인 용어로 대치될 수 있다. 경험적으로 신적 신비에 의해 사랑의 존재가 되지 못한 혹은 그 속에 이러한 사랑의 발전이 없는 이가 바로 원죄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물론 결코 누군가 참된 인간이 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참된 세계로 세우는, 그 '초월'은 결코 쉬운 것도 자동적인 것도 아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 전에, 바르게 살아갈 의지를 훈련하기도 전에, 이미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과 더불어 이러한 상황이 불가능과 목표 사이의 영구적인 긴장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이러한 인간에게 희망이자 힘이 된다. 로너간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타자에 대한 자기 희생의 모범이다.

본서는 '원죄 교리'를 사상적으로 살피는 일종의 교과서 같은 서적이다. 특정 원죄 교리 해설에 대해 옹호, 부정, 비판, 개정하는 저자의 의견은 다른 곳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균형잡혀 있다.  그리고 유대교와 달리 왜 유독 기독교가 원죄 교리를 고집해 왔는지 이해를 돕는다.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편성 및 필연성과 그에 따른 교회의 역할 때문이다. 이토록 좋은 서적이지만, 아쉬운 지점도 있다.

저자는 근현대의 비판을 수용하여 원죄 교리를 폐기한 신학자들이나, 보다 더 적극적인 현대 과학의 도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의 도전은 결코 순진하지 않다. 단순히 현대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써의 원죄는 결코 당위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기독교 신학자들과 교회가 초기부터 우려했듯,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편성과 교회의 역할이라는 점은 여전히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부 지성적 기독교인들은 현대 과학 수용 이후에도 기독교 교리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지동설이나 신대륙 발견 등과 진화는 큰 차이가 있다. 비유하자면, 지동설이나 신대륙 발견이 거울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라면, 진화는 자신의 참 부모가 누군지 알게 된 것과 같다.

즉 진화는 지금까지 쌓아올린 교리 중 일부가 아닌 그 전체에 대한 반성을 요청하기에, 지금까지 교회는 강경하게 다윈과 진화를 모두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진화와 창조의 조화를 주장하는 집단은 무작위와 자연선택, 우연과 필연, 반응과 적응, 변화와 전달 등으로 이루어진 진화를 오해하고 있다. 물이 섭씨 100도에서 끓는 현상이나 0도에서 어는 현상에 어떤 인격적 의지나 목적이나 개입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절대 다수는 그것을 단지 자연스러운 물질의 반응으로 생각할 것이다.

진화는 그런 류이기에, 과학의 눈으로 볼 때 거기서 신의 인도나 개입을 끌어들이는 것은 부조리하다. 실제로 시카고대 제리 A. 코인 생태학 및 진화학 교수는, 진화를 수용한다면서 원죄 교리를 고수하는 집단의 원죄에 대한 모든 대안적 시나리오는 논리적(심지어 성서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비판했다(https://newrepublic.com/article/115759/adam-eve-theologians-try-reconcile-science-and-fail?utm_source=social&utm_medium=facebook&utm_campaign=sharebtn).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난처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국내에는 원죄 교리 개관에 좋은 교과서 같은 서적이 없다. 아담의 역사성 논쟁에 대해 이제서야 조금씩 논의되는 시기에 그로부터 파생되는, 진정으로 기독교가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원죄 교리에 대해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어떻게 다루어왔는지 책을 통해 엿볼 수 있기를 바란다.

도서 정보

제목: Original Sin: Origins, Developments, Contemporary Meanings
저자: Tatha Wiley(보스턴칼리지 조직신학 박사, 현 세인트토마스대학교, 세인트캐서린대학교, 메트로폴리탄주립대학교 신학 강사)
출판사: Paulist Press(2002)
정가: $24.95

진규선 목사(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