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솔하면서 흡입력 있는 글로 SNS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손성찬 목사(람원교회 청년부)가 29일 '남녀 사이는 하나님도 못말리신다'는 제목으로 '혼전순결'에 대해 이야기했다.

손 목사는 "미혼 남녀 사이에 스킨십은 어디까지 가능할까"라며 "사실 이런 것은 기준이 있어봐야... 할 놈은 어떻게든 다 하고 안할 놈은 누가 안 봐도 안 한다. 행위에 대한 수칙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결국 마음의 문제 즉 상대를 어떤 존재로 보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녀 사이는 하나님도 못 말리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지음 받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온전한 성적 자기소유권을 상실하지 않기를, 그리고 나와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인 이성에 대한 존중을 원하신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지점을 통해 영육간에 서로 하나됨의 신비를 기대하신다"며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는 하나님의 관심이 느껴지지 않으시는가? 그런데, 혼전 관계, 그것도 지속적 파트너 체인지의 관계는 부지불식간에 불행의 씨앗을 심어 버린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어렵고, 평생토록 복기된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권장할 만한 모델'로 "스킨십의 정도를 한 축으로 하고 상대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한 축으로 하여, 서로 저 멀리서부터 거리를 좁혀 오다 최종적으로 합해지고 만나는 꼭짓점이 바로 결혼이 되는 것"이라며 "구태의연한 이야기 같지만, 결국 남녀 간 스킨십의 최종점인 성적 연합의 포인트가 결혼이 되는 게 가장 성경적 의미의 구도"라고 강조했다.

손성찬 목사는 "하나님은 남녀가 서로 진정으로 존재 대 존재로 사랑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길 원하셨다. 욕구에 의해서가 아닌 사랑에 의해, 서로를 진정한 '소울메이트(soul mate)'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며 "주 안에서 사랑으로 맺어진 소울메이트, 진정한 반쪽은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기쁨, 순간적인 성적 쾌락보다 더 강렬한 기쁨, 지속적인 기쁨을 선사한다"고 전했다. 다음은 손 목사의 글 전문.

남녀 사이는 하나님도 못 말리신다

#혼전순결에대해

할리우드 영화나 미드를 보다 보면 꼭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술집에서 우연히 눈 맞은 남녀가 서로 술잔을 기울입니다. 다음날 아침 알람이 울리고, 침대에서 일어난 한 사람이 옷을 재빨리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서둘러 나가려 합니다. 이 때 부스스 깨어난 남은 이가 묻습니다. '당신 이름은 뭐에요?' 가는 이가 대답합니다. '알 필요 없어요.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요!'

자주 보신 원나잇스탠드 장면입니다. 처음엔 좀 불편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미디어 장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젊은층에서는 일반화된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면상은 누가봐도 몽골리안의 후예인데, 라이프스타일만 할리우드에요.

이제 젊은이들은 강렬한 사랑을 떠올릴 때, 정신적 사랑이 아닌 육체의 관계로 떠올립니다. 이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고민하는 크리스쳔 젊은이들이 꽤 많습니다. 우선 만혼이 만연합니다. 옛날에는 빨리빨리 해치워버리니 문제가 안 됐는데 말이지요. 더욱이 크리스쳔으로서의 가장 큰 문제는 다름아닌 성 담론에 대해 지독히도 폐쇄적인 한국교회 문화입니다. 이를 담아낼 의지가 없고, 소화할 능력도 없어 보입니다. 이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한복 입고 등장해요. 그냥 유교이지요.

질문입니다. 미혼의 남녀 사이에 스킨십은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사실 이런 것 논하는 것 자체가 빙구짓 같습니다. 기준을 준다면 과연 얼마나 지킬까요? 손 잡으면 안된다고 하면, 저 같은 천재적인 잔머리의 인간들은, 여기서 말하는 손이란 오른손을 말하는 것이라며 왼손을 잡을것입니다. 아니면 손목을 잡겠지요.

할 놈은 어떻게든 다 하고, 안 할 놈은 누가 안 봐도 안 합니다. 행위에 대한 수칙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결국 마음의 문제, 즉 상대를 어떤 존재로 보는가에 달려 있지요. 무엇보다 과연 남녀간의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요. 성욕은 부정적이거나 악이 아닙니다. 타락으로 인해 생겨난 부산물이 아니라, 본래 존재하는 욕구입니다. 비틀어진 것이 문제이지, 절대 욕망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또한 성욕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쉬쉬하다 보면 결국 사고가 터집니다. 가끔 교회 안에서 사귀다 헤어지는 커플들이 있습니다. 보통은 둘 중 하나가 교회를 나가지요. 헤어진 뒤 어색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많은 부분 성관계에 대한 추억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연애감정에 불탈 때는 몰랐던 신앙적 정죄감이 물밀듯이 밀려오기도 하지요. 아마 주로 여성 크리스천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교회나 난봉꾼들이 꼭 있더군요. 사회에서는 개풀도 안되는 것들이 교회 내 비정상적 성비를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그리고 교회라서 더욱이나 말 못하는 문화를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엄중히 경고합니다. 그 여인들에게 진심 다해 사과하지 않는다면, 니 인생은 이미 조졌습니다. 성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이중의 압제를 가한 당신은 소돔과 고모라의 지명타자입니다. 그래서 가장 더러운 게 목회자의 성폭행입니다. 한 영혼을 전방위적으로 압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교적 그리스도교의 관점을 털어내고 성경을 돌아봐야 합니다. 성경이 혼전 성관계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조금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출애굽기에 이에 대해 언급한 계명이 있습니다.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출 22:16)'.

이 명령은 현 시대의 관점으로 고루해보이거나, 혹은 오히려 '여성의 성을 돈으로 사는것이냐?' 라는 질문이 이어질 수 있지만, 분명 이 법을 받았던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여성의 성을 소유물로 여기며 탈취하고 겁간이 일상화된 시대. 그런데 이를 방지하고자하는 법이고, 혹여나 그러한 일이 발생했을 경우 서로 미혼이라면 혼인과 경제적 공여를 통해 반드시 책임을 지라는 의미입니다. 남성본위적 시대에 파격적인 성 담론을 주장합니다.

때문에 우선 문자적으로 볼 때, 혼전성관계 자체가 대역죄인으로 매도될 이유는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제 눈에는 '그러니 니 맘대로 해도 된다'가 아니라, 시대를 불문하고 여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동등한 존재로 여기고,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그리고 조금 더 확대해서 보자면, 성경이 남녀간의 관계에 있어 가장 강조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처럼 불타는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소극적으로는 상대에 대한 '책임',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희생'이라는 가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다른 것이지요. 때문에 이 본문 역시 혼전성관계라는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 Next Step, 즉 '책임'에 더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식'을 소환해 봅니다. 분위기 깨서 죄송하지만 결혼식은 잔치 이전에 책임의 예식입니다. 약속의 증언자들인 하객들 앞에서 이 사람과 평생 함께하겠다고 언약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둘이 한 몸을 이루었음을 하나님 앞에 서로 언약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말하는 언약이란 그 무게에 목숨줄이 달릴만큼 엄중한 것입니다. 그 언약의 징표가 혼인신고이고, 이를 통해 서로 법적책임을 공유합니다. 자고로 도장을 찍어야 구속력이 생기니까요. 좋은 의미에서의 '책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에 대한 온전한 책임이 대내외적으로 약속된 후 성적관계를 맺는 것이 정상적으로 보입니다. 최근 혼전관계가 없는 이들이 결혼 후의 행복도가 더 높다는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발표는, 이 성경의 가르침이 낡고 고루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임을 확인해 주지요.

누군가와의 성관계를 통해 얻어진 쾌락은 반드시 그 심신에 각인됩니다. 설사 새로운 사람을 만나더라도, 이전의 그 경험이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끔 중독처럼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쉬이 관계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진심이라고 하지만, 그 수렁에서 헤어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사랑에 대한 갈망은 있으나, 채워지지 않으니 계속 소진시키는 것이지요. 이성을 성적 소유물로 여기는데 침잠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이런 가르침이 있다고 뭐가 바뀌겠습니까? 결국 자기 꿀리는대로 살아가는게 우리네 인생인데요. 기억하십시오. 제가 지어낸 명언입니다. 남녀 사이는 하나님도 못말립니다. 주변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욕하다가도 내일 만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데이트 폭력이 있어도 계속 만나기도 합니다. 남녀 사이에 에로스적 감정이 폭발할 때, 그 순간만큼은 분명 하나님이 그 자리에 없는 것 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략>에서 달라스 윌라드가 남긴 말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사람들 안에는 예수의 임재와 행동이 빠진 관계란 존재할 수 없다. '일대일' 관계란 없다. 모든 관계는 예수를 통해 중재된다. 나는 너와 함께, 너에게, 너를 위해 해줄 일을 생각할 수 없다. 우리-예수와 나-가 너와 함께, 너에게, 너를 위해 해줄 일을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조언을 드립니다. 특별히 여성분들께 드리고 싶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분명히 성적 욕구와 성적 취향의 다름이 있습니다. 보다 정서적인 여성과 달리, 대부분의 남자는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동물적 의미의 성적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순하게 생겼어도 짐승입니다.

그러니 제발 남자들의 '오빠 믿지?'라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에 넘어가지 마십시요. 성적 자기결정권을 함부로 넘기지 마십시오. 차라리 북한의 김정은이 예수 믿을 확률을 더 믿으십시오.

남녀 관계에 있어 신체적 정서적 신앙적 의미의 모든 성적 휴유증은 대부분 여자가 짊어집니다. 흔적이 남지요. 하나님은 온전히 믿지 못하면서, 오빠들 말은 그렇게 잘 믿습니까? 그 말 믿었다가 조진 인생들 부지기수입니다. 때로 성관계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헤어질 것 같다며 넘어가는 분들 많습니다.

그런 요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집요하게 하고, 헤어짐을 무기로 위협한다면 이미 당신을 물건 취급하는 것입니다. 너만 왜 유별나냐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당신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싶어하는 의지보다, 어떻게든 본능적 욕구를 해소하려고 하는데 더 몰입하는 인생들을 결단코 믿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미 실수했다고 너무 큰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지는 마십시오. 심지어 혼전이 아니라, 결혼 후 간음하다 잡힌 여인마저 정죄하지 아니하신 것이 우리 주님의 접근법이었습니다. 다만, 다시는 범하지 말라 하셨을 뿐이지요. 관계의 단절과 신앙적 수치심이라는 이중적 피해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 잔인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미 일이 진행되었다면 서로 책임의 자리를 물리지 마십시오.

또한 남의 성적 관계에 너무 집중하지 마십시오. 사실 이 문제는 남의 육신이나, 남의 심령을 피폐하게 하지는 않잖아요. 왜 이렇게 관심이 많습니까? 아마 그런 분들이 성욕이 더 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늦게 배운 도둑질 밤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그렇게 정죄하며 영적 고결성을 외치던 인간들이, 나중에 한 방에 훅가는 모습 많이 봤습니다. 이 문제를 다른 죄보다 더 크게 부풀리는 것은 지극히 유교적 스탠스에 불과합니다.

물론 제 말이 면죄부로 들리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이 법이 주어진 '출애굽기'는 이집트 땅으로부터의 탈출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당대를 지배하던 이집트식 문화로부터의 탈출이자, 세상적 가치로부터의 탈출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로의 입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왕을 세우고 법을 세우고, 문화를 만드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주어진 법은 모든 면에 있어 탈출한 이집트와 대조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혼전 성관계에 대한 말씀은 이집트나 고대근동의 문화맥락과는 전혀 다른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강조와, 당대의 문화 속에 결여된 '책임'이라는 가치를 정확히 짚어내고 대조시킨 계율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교회가 음성적인 축첩제도를 폐지시키는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남녀 사이는 하나님도 못말리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지음 받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온전한 성적 자기소유권을 상실하지 않기를, 그리고 나와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인 이성에 대한 존중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지점을 통해 영육간에 서로 하나됨의 신비를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는 하나님의 관심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혼전 관계, 그것도 지속적 파트너 체인지의 관계는 부지불식간에 불행의 씨앗을 심어 버립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어렵고, 평생토록 복기됩니다.

권장할 만한 모델이 있습니다. 스킨십의 정도를 한 축으로 하고, 상대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한 축으로 하여, 서로 저 멀리서부터 거리를 좁혀 오다가 최종적으로 합해지고 만나는 꼭짓점이 바로 결혼이 되는 것입니다. 구태의연한 이야기 같지만, 결국 남녀 간 스킨십의 최종점인 성적 연합의 포인트가 결혼이 되는게 가장 성경적 의미의 구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남녀가 서로 진정으로 존재대 존재로 사랑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길 원하셨습니다. 욕구에 의해서가 아닌 사랑에 의해, 서로를 진정한 soul mate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주 안에서 사랑으로 맺어진 soul mate, 진정한 반쪽은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기쁨, 순간적인 성적 쾌락보다 더 강렬한 기쁨, 지속적인 기쁨을 선사합니다. 시대를 거슬러 보다 복되고 차별적인 성적 관계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