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쿰란으로 가는 길
엔게디에서 다윗의 시편과 만나고, 에스겔의 비전을 접한 뒤, 다윗이 숨어있었다는 동굴은 아쉽지만 더 들여다보지 못하고 폭포만 본 후 서둘러 쿰란으로 향한다.
엔게디에서 36분 23.8마일(38.4km) 90번 도로를 타고 사해 서편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면 황무한 회색 바위틈에 빼꼼히 동굴이 보이는 곳에 도착한다. 이곳이 쿰란 국립공원이다.
이곳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90번 도로를 지나 1번 국도를 만나 유대광야를 가로 질러 서쪽으로 30.57마일(49.2km) 약 1시간 정도 올라가면 된다. 해저 지점에서 해발 지점으로 올라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여리고는 이곳에서 불과 8마일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사해 동편 느보산도 바라볼 수 있다. 갈릴리 호수로 가려면 90번 도로를 타고 요단강 서안으로 계속 85.7마일(138km)올라가면 된다. 차로는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쿰란의 뜻
쿰란의 뜻은 “회색 폐허의 지점”이라는 명칭이다. 사해와 유대광야 사이, 유대광야의 동쪽 끝 부분에 있는 이곳은 광야 특유의 회색빛과 메마름, 그리고 무더움이 있는 곳이다. 앞에는 사해가 있어 끈적끈적함까지 갖추고 있으니 그야말로 회색 어두운 빛의 아무 볼 것이 없는 폐허같은 곳이다.
키르벳 쿰란 또는 간단히 쿰란(Qumran, Khirbet Qumran)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사해 서쪽 둑에서 북서쪽으로 들어간 건조한 평원이며, 칼리아(Kalia) 키부츠 옆에 있다.
아마 이곳은 요한 힐카누스 하에 있던 시절인 134~104 BC에 세워졌을 것이며, 많은 다른 통치(70년 티투스 황제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포함해서)를 겪으면서 유지되어 왔다.
기원전 130년경 사해 북서쪽 기슭, 사람이 살 수 없는 “회색 폐허의 지점”이라는 곳으로 일단의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갈릴리 및 요단 동편으로부터 몰려왔다. 요한 힐카누스의 유대인 종교문화 파괴정책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래서 온전한 신앙을 지키기 원했던 사람들은 구약의 이사야 예언에 따라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기 위하여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사두개파도, 바리새파도, 에셋네파도, 열심당원들도 있었다. 이 무리 중 바리새파에 비해 더욱 급진적이며 금욕주의자였던 에셋네파가 다수를 이루었다. 구약에 염성 (수15:61~62)으로 기록 되어진 곳이 혹 이곳이지 않은가 한다.
◈ 쿰란 사람들
약 150명으로 구성된 남자들만의 공동체였던 이곳에서는 매일 구약성경이 필사되거나 묵상되어 지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여리고로부터 기본적인 음식을 공급받았으며 나머지 생활은 자급자족하는 편이었다.
유대인 제1차 반란이 있던 기원 후 68년까지 거의 200여 년간을 거주하면서 사40:3에 나오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종말을 준비하면서 금욕주의 생활을 하였던 쿰란 공동체는 로마의 침공으로 파괴되고 만다.
세례요한이 활동하던 유대광야와 가깝고, 요단강도 가까워서 혹시 세례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해본다. 세례요한도 광야의 외치는 자가 되어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지 않았던가!! 지금이나 그때나 황폐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이곳에서 그들이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사회나 지금이나 물질과 권세가 최우선 시 되는 세상에서 원시 수도원이라고 부르는 이곳에서 가정도 없이 무엇으로 만족과 행복을 느꼈을까? 생각컨대 그들은 구약의 말씀을 필사하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하나님 약속 안에서 기쁨을 누렸으리라 본다.
비록 그들의 삶이 세상적인 것들로 채워지지 않았어도 광야의 외치는 자로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그들의 삶은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리라 본다.
로마군의 습격으로 200여 년 역사는 깨어지고 사람들은 어디론가 흩어졌다. 그로부터 1879년의 세월이 흐른 후 2000년의 숨겨진 신비가 드러나게 되었다.
◈쿰란 발굴사
쿰란(사해) 사본 두루마리들은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쿰란 주거지에서 적게는 125m(제4동굴)에서부터 0.6마일(1km, 제1동굴)까지 떨어져 있다.
사람이 살던 주거지에서 발견된 문서는 없다. 염소와 양을 치는 베두인 모함메드 아흐메드 엘-하메드(별칭 에드-디브, "늑대")가 1947년 초에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양치기가 잃은 동물을 찾기 위하여 돌멩이를 동굴로 던졌는데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나서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오래된 항아리에 들어있는, 면에 싸여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존 트레버 박사는 무함메드 에드-디브라는 사람에 대해 여러 사람과 인터뷰를 했지만 모두 기본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포함한 여러 변형된 이야기들이었다고 한다.
이 두루마리들은 골동품 상인인 이브라힘 이즈하(Ibrahim 'Ijha)가 베들레헴에 가지고 들어왔으며, 시나고그에서 훔쳤다는 의혹때문에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그후 이 문서들은 칸도라고 불린, 칼릴 에스칸더 샤힌(Khalil Eskander Shahin, "Kando")이라는 도굴꾼이자 골동품 상인에게 넘어갔다.
처음 베두인들이 이 문서를 발견했을 때는 세 개의 두루마리를 꺼냈는데, 칸도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나중에 동굴에 다시 들어가 더 많은 문서들을 꺼내오게 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칸도가 적어도 네 개의 두루마리를 불법적으로 발굴했다고 하기도 한다.
베두인에게서 건네받은 문서들은 제 삼자에게 흥정을 통해 넘어갔다. 그 중 하나는 시리아 정교회의 일원인 게오르게 이샤야(George Isha'ya)였고, 그는 곧 이 문서의 정체를 문의하기 위해 성 마가 수도원에 접촉했다.
이러한 발굴 소식은 메트로폴리스 주교 아타나시우스 예수에 사무엘(Athanasius Yeshue Samuel)-또는 마르 사무엘(Mar Samuel)이라고 더 잘 알려짐-에게 전해졌다.
문서를 조사하고 나서 오래된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마르 사무엘은 이를 사는 데 관심을 보이게 된다. 4개의 두루마리들을 곧 사게 되며 이들은 현재 유명한 이사야 스크롤(1QIsa)과, 공동체 규칙, 하박국 페샤르(하박국 주석)과 창세 묵시록이다. 또 다른 두루마리들이 고문서 시장에 나돌았으며, 이스라엘의 고고학자이면서 히브리 대학의 교수인 엘레이저 수케닉(Eleazer Sukenik) 교수가 3개의 두루말이를 얻게 되었다.
이들은 전쟁 두루마리, 추수감사 찬송과 이사야 문서의 단편들이었다.
1947년 말까지, 수케닉은 마르 사무엘이 가지고 있는 문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들을 사려고 시도했다. 정말 거래가 성사되지는 않았고, 대신 미국 동방 연구소(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ASOR)의 존 트레버 박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트레버 박사는 이 문서의 구절들을 당시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인 내쉬 파피루스와 비교했고 이 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트레버 박사는 아마추어 사진가로도 열정이 있었다. 그는 마르 사무엘을 1948년 2월 21일에 만나 두루마리의 사진을 찍는다. 나중에 어떤 사진은 사본 자체보다 보관 상태가 더 좋기도 했다. 사본들의 면 커버를 제거하고 나서 사그러졌기 때문이다.
그해 3월에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나 안전을 위해 문서들을 이동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으며, 곧 베이루트로 옮겨졌다.
1948년 9월 초, 마르 사무엘은, ASOR의 새 소장인 오비드 셀러스에게 새롭게 얻은 사본들의 단편을 가지고 간다. 그 해 말, 학자들은 사본이 발견된 동굴의 위치를 알아내게 된다. 당국에서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에,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셀러스는 시리아인들의 도움을 받아 동굴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하지만, 셀러스가 주겠다고 한 돈보다 더 비싼 돈을 요구했다. 제1동굴은 결국 1949년 1월 28년에 국제 연합의 조사관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사해 사본을 팔겠다는 광고가 1954년 7월 1일 월 스트리트 저널에 실리게 된다.
7월 1일, 몇 번의 섬세한 협상을 통해 메트로폴리탄과 다른 두 명이 가지고 있던 사본들은 미국 뉴욕의 월도르프-아스토리아 호텔로 옮겨지고, 250,000 달러에 팔린다.
마르 사무엘은 그 돈의 아주 일부분만 받게 되고, 서류상의 이유로 미국 정부가 대부분의 돈을 세금으로 가져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