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어느 집사님 언니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심방을 갔다. 언니는 어려서부터 얼굴도 예쁘고 자립심이 강하고 똑똑한 딸이었다. 맏딸이어서 그런지 아버지의 기대가 컸다.
그런데 딸은 미술을 좋아했다.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해서 상을 타오기도 했다. 그런데 아빠는 칭찬도 한 마디 해주지 않았다. 칭찬을 기대했던 딸은 무관심한 아빠에게 상처를 받곤 했다. 그것이 더 큰 자기 성장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언제부턴가 가정에 변화도 생기고해서 '아무래도 노후대책을 좀 수립해 놔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뒤늦게 미용을 배워 미장원을 개업했다. 큰 욕심 안 부리고 동네에서 직원을 두지 않고 혼자 조용하게 운영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운영을 해 보니 만만치 않았다.
별의별 손님이 다 있다. 가격을 깎으려 하는 할머니, 파마 약을 가지고 와서 '조금만 칠해 줘'라고 하는 할머니 등등.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요구를 단호하게 사절했다. 그랬더니 동네에 소문이 금세 퍼졌고, 손님이 하나 둘 떨어졌다.
어느 날 동네에 새로이 이사를 온 손님이 있다. 가격을 깎으려고 들었다.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님에게 대꾸했다. "손님, 저는 약을 좋은 걸로 사용하고 다른 것과 섞지 않아요. 손님이 판단해서 다른 곳으로 가셔도 좋아요."
이미 가게를 들어온 손님은 그냥 나가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냥 해 주세요."라고 하며 앉았다. 미용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성도의 본심을 아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나는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성도님의 동생 집사님에게 말했다. "집사님, 그 자리에서 언니한테는 상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차마 얘기를 할 수 없었는데, 나는 생각을 좀 달리 하는데. 이런저런 손님들을 받아주면서 동네 사랑방처럼 경영하면 되지 않을까요? 마지노선을 잡아서 어느 정도는 깎아주면서 장사하면 노인들의 입소문은 굉장히 빨라요. 그리고 이사 온 손님에게도 그렇게 말하기보다 '손님, 저는 제품을 좋은 것으로 쓰고 있어요. 한 번 믿어보시고 오시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에요' 라고 하면 어떨까요? 생각을 달리하면 승산이 있을 것도 같은데요."
집사님도 내 말에 동의를 했다. 그리고 언니와 한 번 대화를 나눠보겠다고 했다. 앞으로 가게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갔으면 좋겠다.
성도님은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저 가는 것이니까 갔고, 설교를 들었다. 그런데 최근 신앙의 세계가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언니와는 달리, 집사님은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교회를 다녔다. 언니와 부모님을 위해 기도는 끊임없이 했지만, 언니에게 '교회 가자'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혹여 반발심이라도 생길까봐. 그저 믿음으로 살려고 애썼을 뿐이다.
그런데 언니는 동생의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어도, 잠잠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여실히 보였다. 그래서 어느 날 동생에게 물었다. "나도 교회 가면 어떨까?" "좋지, 언니야. 우리 교회 나가자."
그렇게 시작되어진 신앙생활.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사회생활 속에서 엮인 관계들이 있고, 해 왔던 일들이 있으니, 주일 날 교회 와서 예배드린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더더구나 미장원을 운영하면서. 친구들의 유혹의 손길을 뿌리친다는 게.
그런데 최근에 신앙의 세계가 새롭게 다가온다. 자신에게 새로운 움직임이 느껴진다. 얼마 전에 영화 <벤허>를 봤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두 번이나 본 영화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롭게 다가왔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마음에 잔영으로 남는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너무나 인자하셨던 예수님의 영상을 잊을 수가 없다.
동생의 권유로 최근 창세기를 보고 있다. 예전에도 설교를 듣고 알고 있던 이야기지만, 최근에 마음에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걸 기독교에서는 은혜라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뭔가 작업을 하시는 거에요." 그렇다. 그 성도 안에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신 게다.
때때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는 성도들을 본다. 오랜 신앙의 경륜이 우리의 영적인 삶을 보장해 주는 건 아니다. 교회 안에서 갖는 이런 저런 직분이 영적인 삶을 만들어 주는 건 아니다. 아니 오랜 신앙생활이 외식적인 삶으로 만들기도 한다. 매너리즘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 한심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같은 경직된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닐까? 거창하고 화려한 형식은 갖고 있지만, 예수님의 정신과 철학은 잃어버린 채 외식의 길을 걷는 건 아닐까?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비난하기는 잘하지만, 자신을 성찰할 줄 모르고, 자신 안에 들보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눈 속에 티를 보면서 '쯧쯧' 혀를 차면서 손가락질 하는 영적 교만.
이제 시작돼야 한다. 내 안에 새로운 변화가. 예수님이 내 마음의 구정물을 휘저어야 한다. 저 밑에 가라앉아 있는 음식 찌꺼기들이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말씀으로 하나하나 점검되고, 정화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치유와 회복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딱딱하게 굳어서 자신의 영적인 모습이 느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영적인 삶에, 성령께서 기름 부으셔서 부드러운 심령으로 갈아 엎어져야 한다. 기경되지 않은 거친 마음에는 그 어떤 새로운 영적인 기운도 시작될 수 없다.
세상에 어두워진 눈이 하늘에 밝아져야 한다. 보이는 것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고 염려하는 우리의 마음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확연해져야 한다.
이제 내 마음에 새로운 영적인 기운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우리 가정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영적인 분위기로 압도되기를 원한다.
이 민족을 섬기는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 강하게 갈망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새로운 강력한 도전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