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의 역사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 들녘 | 284쪽 | 9,000원

이 책의 뒷표지에는 노벨상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말이 실려 있다. "고문이라는 수단을 통해 30개의 폭탄을 제거했다고 하자. 그 대가로 당장 몇몇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다른 곳에서 활동할 50명의 새로운 테러리스트를 만들어 냄으로써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불러올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고문을 이렇게 정의한다. "고문은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한 비열하고도 사악한 침해이자 죄악이며,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저열한 수단이다"(5쪽).

책 1장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문'을 다루고 있다. 바빌론이나 유대 율법에는 고문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아시리아인과 이집트인들이 고문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있다(17쪽). 기원전 약 1,300년경 이집트의 히타이트 원정 때, 적의 병력 배치 상황을 알아내기 위해 람세스 2세는 몇몇 포로들을 고문했다.

그리스 국가에서도 고문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소송 당사자들이 직접 고문을 할 권리도 주어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바사니스테'라는 고문기술자가 해당 지역에서 그 일을 담당하였다. 국가적 사건에서, 특히 반역죄의 경우 노예들을 동원하여 고문을 할 수 있었다. 고문을 가하는 목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고문하지 않고는 알아낼 수 없는 정보를 얻는 데 있었다(19쪽).

로마에서도 노예와 외국인들에 대한 고문이 법적으로 용인되었다. 반역죄는 예외 없이 고문으로 다스려졌다. 티베리우스를 계승한 칼리굴라는 식사하면서 죄수들이 고문당하는 것을 즐겨 구경했다고 한다. 어떤 죄에 대해서 그는 능지(凌遲, 천번 칼로 도려내기)와 비슷한 고문을 명령하기도 했다. 비교적 온화한 편이었던 황제 클라우디우스도 음모와 암살 혐의가 있는 자에게는 고문을 가했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에게 인사할 때 실수로 칼을 차고 왔던 기사(騎士)를 고문했다.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기 전, 로마에서는 기독교인들을 고문해 구세주를 부인하고 황제의 지배권을 승인하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흔했다. 서기 64년, 네로 황제는 로마를 불태운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면서 고문을 통해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이 그 범인'이라고 지목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고문 장소는 궁궐의 정원이었다.

어떤 희생자들은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채 야생의 개들에게 조각 조각 물어 뜯겼고, 또 다른 희생자들은 역청이 발라진 채 불태워져 밤의 횃불 역할을 했다. 에피카리스라는 여자는 황제에 대한 음모죄로 기소됐는데, 공범자의 이름을 대지 않자 속옷만 입혀진 채 온종일 고문을 당하며 밖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로마에서 고문은 거의 모든 형벌에 쓰일 정도로 너무 흔하게 사용되었다. 고문은 추방이나 사형을 능가할 정도로 빈번했는데, 시민들이 채무자를 사적 공간에 가두어 놓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고문할 수 있을 정도였다. '플란젤룸'이라고 불렸던 로마의 채찍은 모두가 두려워했다. 그 가죽 끈은 황소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때로는 납을 매겨 더 무겁게 만들었기 때문에 살갗 깊숙이 파고 들어걸 수 있었다(27쪽).

유세비우스는 <팔레스타인 순교자들의 역사>에서 아피아누스의 처형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순교자는 매우 높이 매달렸는데, 이는 구경꾼들이 그 모습을 보고 공포에 떨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사형 집행인들은 빗처럼 생긴 도구로 그의 옆구리와 갈비뼈를 찢어 온몸이 마치 한 뭉치의 종기덩어리처럼 부풀어 오르게 만들었다. 그의 형상은 금방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그 후 순교자의 두 발은 오랫동안 뜨거운 불로 태워졌다. 그 불은 뼈들이 마른 갈대처럼 드러날 때까지 계속 타올랐다(29쪽)".

3장은 '중세의 종교재판'을 다루고 있다(45-77쪽). 초기 기독교 교회는 로마 제국 치하에서 사용되었던 고문을 반대한다고 선포했다. 종교 문제에 관한 재판의 새로운 형태를 위해 마련된 종교재판은 처음에는 이단을 압박하는 데만 이용됐으나, 점차 다른 사건들에 관한 것까지 다루게 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부정적 평판을 얻기에 이르렀다.

종교재판소는 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독일의 여러 주들, 그리고 스페인 북부에서 특히 그 권세가 드높았다. 처음에 고문은 종교재판관이 속한 지방 수도원 수사들이 집행했다. 종교재판관들은 자신의 조수와 법관을 임명할 수 있는 등 막강한 권한을 누렸다. 특히 독일에서 고문은 범죄의 자백을 유도하기 위해 폭넓게 사용되었다(59쪽).

이탈리아에서 가장 흔한 고문 방법은 '매달아놓기'였다. 이는 밧줄로 뒤에서 희생자의 팔을 묶은 뒤 기둥에 부착된 도르래에 매다는 방법이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20세기까지 계속돼 온 고문 사례들과 고문이 남긴 무참함, 고문에 반대하는 투쟁과 희생자들이 겪은 고통을 고발하고 있다.

/송광택 목사(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