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기 교회의 연합운동 결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서 번역의 협력이다. 어느 선교지에서든지 초기 선교 사역 중 성서 번역과 인쇄 및 출판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한국 선교도 마찬가지로 성서의 번역, 출판은 중요하고도 시급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가장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은 일은 성서 번역 사업이다. 1887년 언더우드가 그 동안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손질한 후 그것을 인쇄하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 그 곳 미국 성서공회의 헵번(J. S. Hepburn)을 만났는데, 그는 다음 같이 조언했다. 한국도 장기적으로 성경의 한국어 번역을 위해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했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돌아온 즉시 ‘상임성서실행위원회’(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를 1887년 2월 구성했다. 그 공식 명칭을 ‘한국성서상임위원회’(PBC in Korea)라 했다. 상임성서실행위원회가 조직된 것은 1893년이다. 이 위원회는 여러 선교회 대표로 구성됐다. 이 위원회가 한 일은 번역자 선출, 원고 검토, 편집, 그리고 최종적으로 성경의 가격을 결정하는 일 등이었다.
이 위원회 산하에 ‘번역위원회’(The Translating Committee)와 ‘개정위원회’(The General Revising Committee), 두 분과위원회를 두었다. 번역위원회는 성서 번역 사업을 총괄했으며, 번역은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불어, 독어, 중국어 성경과 영어 개역판을 참고서로 사용했다.
번역위원회에는 초기부터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이 참가했는데, 언더우드는 첫 조직 때부터 세상을 떠나던 1916년까지, 일생 동안 위원장직을 맡아 수고하여 한글 성경 번역에 혁혁한 공로는 남겼다.
이들의 노력으로 1910년 신약성경이 완역되어 출판됐다. 구약 역시 여러 사람이 부분적으로 번역하여 후에 이것을 모아 완본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쳐 1911년에 완성, 출판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신구약 성경을 갖게 되는 경사를 맞이했다.
연합사업은 교육기관의 신설과 통합으로 이어졌다. 숭실전문학교(The Union Christian College)는 평양에 세워졌는데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마펫에 의해 시작됐다. 1905년 봄 서울에서 열린 감리교 연차대회에 참석한 베어드(W. M. Baird)가 감리교회와 연합으로 이 학교 경영을 제안했다. 감리교회는 이 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장·감 연합으로 대학을 운영했다. 이 학교는 네 장로교 선교부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가 연합으로 경영하는 모범적 연합 교육기관이 됐다.
다음으로 연희전문학교(The Chosun Christian College)가 있다. 언더우드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이룩한 에큐메니컬 기구가 연희전문학교다.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회와 남·북감리교회가 연합하여 경영하던 이 대학은 한국의 대표적 연합기관으로 오늘에 이른다. 1957년에 연희대학교는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이 합병하였는데, 연희의 ‘연’자와 세브란스의 ‘세’를 합해 오늘의 ’연세대학교‘가 됐다.
다음은 피어선기념성경학교다. 이 학교는 1912년 연합 성경학교로 시작됐는데, 후에 이것이 피어선기념성경학교가 됐다. 이 성경학교는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 부장으로 오래 수고한 피어선(Arthur T. Pierson) 박사를 기념하여 세운 학교다. 이 학교에 남·북 감리회, 북장로교회, 그리고 캐나다 연합교회가 참여하여 협력했다. 이 성경학교는 초기부터 유지돼 오던 ‘피어선’이란 이름이 생략된 채, 근래 이 학교가 옮겨간 경기도 평택의 지방 이름을 본떠 평택대학교로 개칭됐다.
세브란스의과대학 및 병원은 네 장로교회, 두 감리교회, 성공회가 연합 사업에 동참한 기관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대부분 협력을 거부하던 제7일안식일교회가 이 일에 동참한 것이 눈에 띈다. 세브란스의과대학에는 세 사람의 일본인, 네 사람의 한국인, 여덟 사람의 외국인 교수가 강의했고, 또한 세 사람의 일본인, 네 사람의 한국인 강사가 출강했다. 의과대학은 각 선교부가 파송한 이사로 구성된 행정위원회가 관리했다. 세브란스병원 원장 에비슨은 그가 쓴 글에서 세브란스에 “한국에 있는 모든 의료 선교사들이 연합하기 위해 결합하였다.”고 기록했다.
에비슨의 에큐메니즘 정신은 투철했다. 그는 본래 감리교인이었으나 장로교회 선교사로 임명받고 한국에 나와 일했다. 그는 교파 의식 없이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마지막까지 연합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1930년 7월 전조선교역자하기수련회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부정(不正)한 세력이 점점 가세하여 우리의 생활을 공격하는 이 시대에 기독교의 세력은 가급적 밀접히 연결할 필요가 잇지 안이한가. 하나님은 하나요, 그리스도도 하나요, 성신도 하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왜 하나가 되지 못할가.”
또한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37년 전 나는 가나다 감리교인으로 미국 뉴욕 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가서 조선에 선교할 목적을 말하였다. 내가 능히 장로교 선교사가 될 것 갓이 생각하느냐 하엿드니 그의 [엘린우드:당시 해외선교부 총무] 대답이 조선에 감리교적 열심을 그대로 가지고 가서 그리스도만 힘 잇게 전하면 그만이라고 하엿다. 그는 또 말하기를 조선에 장노교 선교사를 보냄은 장노교를 유력(有力)하게 하려는 것보다 조선을 주의 나라로 인도하려 하노라 하엿다.”
위의 글에서 초기 선교사들의 에큐메니즘 정신을 정확하게 엿볼 수 있다. 초기 선교사들의 연합 정신으로 많은 연합 기관이 형성되어 내려오다 이들 대부분이 오늘에 이르러 한국인들에게 넘어와 협력을 다지게 된 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공헌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