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6장은 <안식 후 첫날 일찍이 해 돋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이 주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았다고 전합니다. <해 돋을 때>란 막 해가 떠오르려는 <어슴푸레한 미명>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당시 그 여인들이 어둠의 끝과 광명이 막 시작되려는 경계선상에 서 있었음을 뜻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 날카로운 경계선이 단지 동트기 전과 그 이후의 빛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도 확연하게 갈라놓고 있음을 지나쳐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과거만큼 분명한 것도 없지만, 또 미래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란 늘 <해 돋을 때>와 같은 경계선상의 긴장을 피할 수 없는 어슴푸레한 길목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그렇게 주님의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가 돌문이 열린 것과 그 안에 주님의 시신이 없음을 확인하고 몹시 슬퍼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항상 헛갈립니다. 무덤에 주님의 시신이 없어서 울었다니... 그럼, 거기에 주님의 시신이 있었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안도하며 기뻐했을까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시신이 있으면 슬퍼하는 게 맞고, 시신이 없으면 살아생전 주님이 예고하신 대로 부활하신 거니까 오히려 기뻐하는 게 옳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지금 막달라 마리아가 빈무덤을 향해 하염없이 울고 있습니다. 천사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요 20:13)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요 20:15)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24:5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도 하는데 이는 다 아쉬움의 표현이며 부드러운 책망입니다. 그럼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여전히 주님을 알아채지 못하고 <당신이 옮겼거든 내게 이르소서 내가 가져 가리이다> 그럽니다. 주님을 단지 2천 년 전의 존재, 과거완료적 인물로만 생각한다면 누군가가 옮기고 운반할 수 있는 사체나 물체쯤으로 여긴 막달라 마리아의 인식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현재와 미래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이나 발언권도 없는 지나간 시간의 박제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단지 내가 쉽게 소유할 수 있는 종교적 품목의 하나로, 혹은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문화생활의 한 컨텐츠로, 버리기에는 왠지 찜찜한 정도의 존재로만 여긴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바로 내 눈 앞에 두고도 <주님 시체를 가져 가겠다>고 한 막달라 마리아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부활이라는 미래적 현실에 직면하고도 여전히 경계선 저쪽인 과거에 뿌리를 박고 있었습니다. 몸은 이쪽이었지만 영혼은 아직도 저쪽을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결국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다고 믿어왔던 과거의 모든 기준을 밑바닥에서부터 송두리째 허물어 버리는 충격적인 힘으로 육박해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누구를 찾느냐?>는 주님의 물음은 아직도 경계선 저편에 있는 너의 모든 관념과 사고의 잣대를 내버리라는 깨우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부활의 아침을 맞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주님의 물음이자 요청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지난 시간들 속에서 겪었던 탄식과 슬픔, 분노와 좌절, 그리고 죽은 자의 무덤가를 서성이며 우는 것으로는 결코 내 삶을 새로운 미래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왜 우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더 이상 무덤을 향해 울지 마십시오. 더 이상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허무를 노래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오히려 <가서 내 형제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요 20:17)고 하셨습니다.
부활이 답이요 부활이 우리의 영원한 미래라는 것입니다.
/노나라의 별이 보내는 편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