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초 미국장로교(PCUSA) 총회장을 지낸 故 이승만 목사의 추모예배가 25일 오후5시 뉴저지 필그림교회(담임 양춘길 목사)에서 개최됐다.

PCUSA 동부한미노회(노회장 김진호 목사) 주관으로 드린 이날 예배에는 뉴욕과 뉴저지 PCUSA 관계자들 뿐만 아니라 타교단 목회자들도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이승만 목사는 지난 14일 오전, 급성골수암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향년 83세.

추모예배는 김진호 목사(노회장)의 인도로 김관선 목사(노회 은퇴목사) 기도, 남후남 장로(직전 노회장) 성경봉독, 필그림교회 남성중창단 성가찬양, 조덕현 목사(노회 공로목사) 설교, 조문길 목사(사무총장) 고인약력 소개, 목회자 일동 추모찬양, 윤명호 목사(노회 공로목사) 추모사, 김용주 목사(노회 공로목사) 추모사, 이승규 장로 유가족 인사, 김상수 장로(필그림교회) 광고, 양춘길 목사(필그림교회) 축도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설교를 맡은 조덕현 목사는 ‘화해의 순교자’(고후 5:17-19)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통해 “고인의 화해를 위한 평생의 활동은 영원히 기억되고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라면서 “화해의 복음을 위해 평생을 바친 고인에 대해 방지일 목사도 생전 높은 구상과 착상은 오로지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평가했다.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화해의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날 추모사는 고인의 70년지기 친구인 윤명호 목사가 ‘나의 친구, 승만!’이라는 제목으로 전해 큰 감동을 줬다. 윤명호 목사는 추모사를 통해 평양에서 함께 신앙을 했던 추억들을 전하면서, 이민초기 미국 교회내 한인으로서 당당히 활동하며 한인의 위상을 높여줬던 이승만 목사의 정신과 헌신적인 삶에 대해 증거했다.

김용주 목사는 ‘화해를 위한 삶’이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통해 고인이 한 평생 순례자의 길을 걸었다고 평가했다. 추모사 이후에는 고인의 일대기를 담은 추모영상이 상영됐다. 또 이날 참석자들은 고인이 가장 좋아했던 찬송 ‘내 주 예수 주신 은혜’를 함께 부르며 추모예배를 마쳤다.

1931년 3월 25일 평양에서 출생한 이승만 목사는 미국 켄터키주 리이빌신학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는다. 1958~73년 켄터키주 보스턴장로교회와 웨스터민스터교회에서 목회를 했고, 1961~73년에는 켄터키주 루이빌대학교 교수 및 교목으로 사역했다. 1964년 예일대 신학부를 졸업하여 석사학위를 받았고, 1972년에는 시카고신학교 박사학위를 취득(종교사회학)했다. 1973~80년 미국연합장로교 세계선교부 중동 지역 총무, 선교국제학 총무를, 1980~88년에는 미국연합장로교 총회 동남아시아·태평양 지역 총무를, 1988~98년에는 미국장로교 총회 세계선교부 부총무를, 1992~93년 미국교회협의회(NCC USA) 회장을 역임했다. 1998년부터 별세하기 전까지 미국 버지니아 주 유니온장로교신학교 교수 및 총장특별보좌역을 지냈다. 2000년 6월 24일 미국장로교 제212회 총회장에 취임했고, (사)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이사장, 미국 컬럼비아신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이승만 목사는 1931년 3월 25일 평양에서 태어나 장로교회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고 평양 성화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모와 네 명의 누이들은 북한에 두고, 남동생과 함께 남한으로 피신했다. 이 목사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의 소식을 모른 채 지내다, 1978년 누이들과 연락이 닿았다. 이미 모친은 8년 전 소천하고, 아버지도 공산당원들에게 잡혀 옥사한 뒤였다. 이런 뼈아픈 경험은 그가 인생 전반에 걸쳐 평화와 화해, 특별히 남과 북의 평화 논의를 이끌어 가는 데 큰 원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유족으로는 아내 해선, 자녀 애나, 피터, 미나 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