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각 교단 노회와 기관들이 신년하례회를 열고 있는 가운데 RCA 소속 한인교회들이 신년하례회를 통해 깊은 말씀을 교제를 나눠 주목된다.
RCA 뉴욕한인교협과 뉴저지한인교협은 12일 클로스터한인장로교회에서 연합 신년하례회를 개최했다. 이날 신년하례회는 김학룡 목사(RCA 뉴저지한인교협 회장) 의 사회로 이재봉 목사(RCA 뉴욕한인교협 회장) 기도, 차재승 목사(뉴브론스윅 신학대) 말씀, 신성능 목사(뉴욕빌립보교회) 축도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말씀을 전한 뉴브론스윅 신학대 차재승 목사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에 대한 구절인 '눅10:25-37'을 본문으로, 일상적인 설교형태가 아닌 깊은 신학적 접근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예배 이후에는 로체스터한인장로교회가 마련한 점심식사를 함께 나눴으며, 식사 후 인사나누기와 덕담나누기를 통해 새로운 회원들을 환영하고, 2015년도 RCA 뉴욕한인교협과 뉴저지한인교협의 발전을 기원했다.
올해 주요행사로는 1월18일 뉴욕지역 연합제직세미나가 뉴욕신광교회에서 개최되며, 2월6일-8일은 뉴저지지역 청지기 성경세미나가 '성경을 알고 성경대로 삽시다'라는 주제로 은혜와평강교회에서 개최된다. 5월은 CPAAM총회와 RCA 한인교협 총회가 열릴 예정이며, 8월에는 2015 Jesus Retreat이 열린다. 다음은 이날 차재승 목사의 설교 주요 내용이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눅10:25-37) 차재승 목사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여러 방면으로 묵상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자기 사랑' 속에서만 이웃을 이해하는 율법사의 그 위선된 포장을 벗겨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고난 당한 인간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신 것이다. 우리 자신 속에서만 이웃을 찾는 좁은 인간의 울타리를 벗기신 것이다. 그들을 그 품에 안으셨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이고도 특별한 사랑을 보게 됐다.
본문 말씀에 율법사가 예수님께 자기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었는데, 예수님은 오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그 이웃에 대한 중심이동이 필요함을 말씀하신다. 율법사가 생각하는 이웃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이웃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이란 강도 만난 자가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진짜 이웃이라는 것이다. 이웃을 정하는 주체가 다른 것이다. '자신'이 아닌 '강도 만난 자'가 이웃을 정하는 주체가 된다.
저는 RCA 신학위원회에 속해 있다. 교단 내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 백인우월주의가 RCA가 당면한 과제 중 하나다. 이것에 대한 논의 중에 백인 우월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본문으로 빌립보서 2장 케노시스 구절을 어떤 백인이 제시를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자기를 낮춰 인간과 같은 모양이 되셨다는 내용이기에 백인들이 원래 우월하지만 낮은 너희에게 다가가겠다는 굉장히 위험한 해석이 될 수 있다.
인종차별의 문제는 차별 당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낮추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차별당하는 자, 고난을 당하는 자, 서럽고 학대 받는 자, 그들이 과연 우리를 이웃으로 삼아 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우리 또한 '내 이웃'을 찾을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자가 이웃을 삼을 수 있는 이웃'이 스스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오늘 본문은 표면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위선을 경고하고 계시다. 죽은 시체를 가까이 가지 않는 율법을 지키는 레위인들의 비유를 들면서 예수님은 대결구도를 설정해놓으셨다. 아주 심각한 주제가 여기서 볼 수 있는데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인류 보편의 가치가 충돌하는 구절인 것이다. 종교적 가치관을 지키려는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지만 인류의 보편적인 연민에 근거해 강도 만난 자를 돌본 것은 사마리아인이다. 정체성 속에 갇혀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조차 쫓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지적하고 계신다.
세속화된 오늘날의 모습을 보면 종교적 가치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보다 더 앞세울 때가 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대할 때마다 두려움과 탄식, 놀라움이 동시에 다가온다. 당시의 종교가 가졌던 위선과 거짓을 고발하셨고, 이것은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의 치명적인 문제도 동시에 노출시키고 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겼다는 헬라어는 하나님이 인간을 불쌍히 여겼다는 부분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그를 도우면서 자기도 강도를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자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에 있는 사람을 태우고 주막으로 가서 돌보고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까지 했고, 그것을 지켰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은 어떻게 읽어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율법은 그리스도의 비유 속에 아주 강렬하고 구체적으로 나오게 된다. 너 자신을 희생해서 그들에게 이웃이 되라는 구체적이고 혁명적인 내용으로 나오게 된다. 기독교는 희생이고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 이웃이라는 개념이 바뀌고 내용 또한 희생을 통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 또한 종교의 틀을 벗어나 고난받는 이웃이 이웃을 삼아줄 수 있는 일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비유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다.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먼저 이 비유 속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 길가던 행인은 강도를 만나서 옷을 벗기고 때려서 죽기 직전의 상태로 버려졌다. 이 모습 속에 예수님의 고난이 밑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일련의 행동도 결코 낯설지 않다. 목숨을 건 연민과 자기 희생, 돌봄과 다시 돌아옴은,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시고, 또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밑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예수님은 죽기 직전의 우리를 찾아오시고 상처를 치유하시고 짊어지셨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어려운 문제가 당면한다. 왜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밑그림만 그리셨는가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설명하지 않으셨다.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실 자체만을 예언하셨다. 죽음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한 힌트만 말씀하셨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역사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연구하다가 전통적인 기독론을 포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에 대해 밑그림처럼 암시만 던지셨는데, 여기서 우리가 더 깊게 보지 않으면 현대신학자들의 주장에 쉽게 동조해버리는 아주 우매한 길로 가게 된다. 깊이 보지 않으면 이런 역사적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그저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메시지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에게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하나님은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신 것으로 보인다. 신비스러운 삼위 하나님에 대한 밑그림은 예수님이 직접 그리셨다. 그런데 구체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공관복음에 딱 한 군데에서 설명하고 계신다.
또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으셨다. 결국 급진적으로 다가오셨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주 천천히 거리를 두고 조금씩 조금씩 드러내시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다가옴과 멀어짐의 모습이 이 본문의 말씀 속에 연결돼 있다.
가정을 하는데 만약 공생애를 시작하시자마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셨다면 그 당시 사람들이 모두 정신이상자라고 바라보던지, 아니면 그 내용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큰 혼란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율법사가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면 이 비유를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이 절제도 우리는 볼 수 있다. 또 천천히 다가오심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한계 때문에 그렇게 천천히 다가오신 것이다.
예수님 스스로가 신적인 의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의 문화가 그리스도를 담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제자들에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맡겨두신 것은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신비스럽고도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가장 나중 된 우리에게까지 맡겨두셨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희생이고 성육신과 같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것과 또 그리스도를 닮아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는데 있어 가장 심오한 일이다. 인간의 아주 저급한 한계 있는 역사 마저 끌어 안으시는 참 사람이자 하나님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신 것이다. 이것을 알아가는 기쁨과 감격이 올 한해 살아가는 중에 우리에게 계속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