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
그런데 수7:13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면서부터는 이 말이 마치 하나님에 대한 공식 명칭인 것처럼 자주 사용된다. 특히 이스라엘 회중이 모인 자리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여기에 “만군”이란 말이 덧붙여진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야웨”란 말도 자주 나타나는데 특히 예레미아서에서 그러하다. 드물기는 하지만 이 호칭이 예레미아서 외에도 습2:5; 대하17:24 등에 나온다.
그런가 하면 삼하7:26, 27과 렘 38:17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야웨”라는 보다 긴 명칭도 등장하는 반면, “이스라엘”이란 말이 생략되고 “만군의 하나님 야웨”란 말도 나오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이란 말까지 생략하여 단순히 “만군의 야웨”라는 말도 나타난다. 이외에도 사42:8에는 “나는 야웨니 이는 내 이름이라”라는 말이 나오고 사43:11에는 “나는 야웨이다”라는 말도 나온다. “만군의 야웨는 그 분의 이름이다”라는 말과 함께, “만군의 하나님 야웨는 그분의 이름이다” 그리고 “임금이신 만군의 야웨는 그분의 이름이다”도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의 이름은 야웨이다”(렘16:21)라고 하시는 곳도 있는가 하면, “그분의 이름은 야웨이다”(암5:8; 9:6)라고 하는 곳도 있고, “당신의 이름이 야웨이십니다”(시83:18)라고 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사49:26에는 “나는 너의 구원자 야웨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렘 32:17에는 “당신은 주 야웨이십니다”란 말이 나온다. 이러한 구절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야웨”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에 첨가된 말들은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보다 분명히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대상29:10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야웨”라고 불렀다. 그리고 렘23:36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 만군의 야웨 우리의 하나님”이란 호칭이 등장하고, 렘32:27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모든 육신의 하나님 야웨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나온다. 수식어가 하나씩 더 첨가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식어가 붙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야웨”라는 사실에 어떤 변동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반대로 이것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야웨”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일러 “야웨”라 하시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야웨”란 호칭을 사용한 경우를 제외하고도 “야웨”란 명칭이 “엘로힘”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예는 특히 에스겔서에 많이 나온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로 “엘로힘”이란 단어가 사용되고 2장과 3장에서는 “야웨”와 “엘로힘”이 나란히 등장한다. 그러나 4:26에 “야웨”란 명칭이 단독으로 쓰이면서부터는 “야웨”와 “엘로힘”이란 명칭이 때에 따라서는 함께 쓰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단독으로 쓰이게 된다.
2) 문제점들
출6:3에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야웨(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말씀하셨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야웨”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몰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창4:26에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창2:4에서 시작하여 이 호칭이 계속해서 그리고 여러 번 쓰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시기 전에 그 분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독일의 구약학자 슈미트(Schmidt) 그리고 최근에 서거한 역시 독일 구약학자 프로이스(Preuss)에 의하면 미디안 땅에 거주했던 켄 족속(Kenites)이 야웨 하나님을 알고 섬겼는데, 이 켄 족속은 바로 가인의 후예이다.
이 켄 족속은 모세의 처가가 속했던 족속이다. 그리고 켄 족속은 미디안 족속의 일부이다. 올브라이트에 의하면 켄 족속이란 말은 구리장색인에 속한다는 뜻이다. 그의 말이 옳다면 이 켄 족속의 본업은 목축업이 아니라 구리공예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세의 장인은 구리장색인이 아니라 양을 길렀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모세의 장인이 속했던 켄 족속이 가인의 후예라는 견해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러한 견해는 가인의 후예들이 노아 홍수 때에 살아남았다는 전제 하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노아홍수에 대한 성경의 기록과는 조화를 이루기 힘든 전제이다.
출2:16; 3:1에는 모세의 장인이 제사장이라고 되어있는데, 뒤에 그가 야웨 하나님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모세와 아론이 있는데서 제사를 지낸 것을 보면 그가 “야웨”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출18:11-2). 키뇽고(Kinyongo)라는 불란서 학자는 출18:11에서 모세의 장인이 한 일은 제사드릴 물건을 가져온 것이지 제사를 드린 것은 아니라고 해석함으로써 그가 제사장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일 그의 말대로 이드로가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면 누가 드렸는가? 당연히 아론이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드로가 제사를 드린 후에 아론과 장로들이 그에게로 와서 함께 식사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가 하면 저명한 고대유대사가인 비커만(Bickerman)은 이드로가 “야웨”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유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만일 이드로가 우상들을 섬겼거나 이방신의 제사장이었더라면 그가 “야웨”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일이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의 장인의 이름이 출2:18에는 “르우엘”로, 4:18에는 “이드로”로, 그리고 민10:29; 삿4:11에는 “호밥”으로 되어있는데, 이 셋은 동일인임에 틀림없다.
만일 켄족속이 가인의 후예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아우를 죽인 것 때문에 저주를 받은 가인의 후예들은 “야웨” 신을 알고 섬겼는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아벨을 대신해서 허락하신 셋의 후손들은 “야웨” 신을 섬기지 않았는가? 그리고 창14:18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된 멜기세덱은 어느 족속에 속했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어디에서도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슈미트와 프로이스 역시 이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성경도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고 있으나 적어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에 그의 조상들 즉 셋의 후손들은 “야웨”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가정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에 가나안 땅에서 자신을 그에게 소개하실 때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니라”라고 창 15:7에서 말씀하셨는데, 그 이전에도 이미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여호와” 즉 “야웨”라고 불렀다고 되어 있고(12:8; 13:4), 그 후에도 하나님을 “야웨”라고 불렀다고 되어 있다(창21:33). 그리고 이삭과 야곱도 하나님을 “야웨”라고 불렀다고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창26:25; 28:16),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도 자신의 이름이 “야웨”라고 말씀하셨다(창28:13). 그런가 하면 심지어 라반도 아브라함의 하인을 처음 대할 때 “야웨께 복을 받은 자여”라고 말한다(창24:31). 그리고 발람뿐만 아니라(민 22:8) 심지어 발락도 하나님의 이름이 “야웨”란 것을 알고 있다(민24:11,23).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야웨”란 것을 알았는가? 후에 불레셋 인들도 하나님의 법궤를 “야웨의 법궤”(아론 야웨; )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이들도 하나님의 이름이 “야웨”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라고 한 시79:6과도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처럼 성경에서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그것은 모세5경이 모세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여러 문서들이 후대에 이르러 편집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체계화한 사람은 독일 구약학자인 벨하우젠(J. Wellhausen, 1844-1918)인데 그에 의하면 모세5경이 4개의 문서들, 즉 야웨 문서(Yawehistic source), 엘로힘 문서(Elohistic source), 신명기적 문서(Deutronomistic source), 그리고 사제적 문서(Priestly source)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 후 이러한 견해를 대부분의 학자들이 다소간 그대로 따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비단 자유주의 학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상당수의 보수주의주의 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세5경이 후에 편집된 것은 사실이나 그러한 편집은 모세의 기록에 근거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점에 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야웨”란 명칭에 대한 기술에 대해서 일관성이 없는 것은 서로 다른 문서들의 결합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서설(Documentary Hypothesis) 또는 편집설(Redactional Hypothesis)은 19세기 구약학자 벨하우젠이 처음에 1878년에 출판된 그의 책 이스라엘의 역사(Geschichte Israels I)에서 그리고 이 책의 개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1883년에 출판된 이스라엘 역사서언(Prolegomena zur Geschichte Israels)에 발표한 이래로 약 100여 년 동안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논의되어 왔다. 그동안에 이 학설은 한편으로는 궁켈(Hermann Gunkel, 1862-1932), 모빙켈(Sigmund Mowinkel, 1884-1966),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71), 그리고 놋(Martin Noth, 1902-1968) 등에 의해서 수정보완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반대하는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으나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아직은 벨하우젠의 견해와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실정이다.
오늘날에도 벨하우젠과 그 이후의 학자들이 주장한 바대로 모세5경이 네 개의 문서들을 바탕으로 편집되었다는 설과 모세가 쓴 것이 후대에 보충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지배적이다. 어느 경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서설에 있어서의 문제는 “야웨”와 “엘로힘”이 동시에 쓰인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세 저작설의 문제는 왜 일관되게 “엘로힘”과 “야웨”를 사용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가 맞건 간에 많은 경우에 “야웨”란 단어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을 뜻하는 고유명사로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의 하나님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한대로 라반이나 발람 또는 발락이 하나님의 이름이 “야웨”란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 아마도 이들은 “엘”이나 “엘로힘”과 같은 보통명사를 사용하였는데, 후에 편집자가 이를 “야웨”로 바꿔 쓴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발람은 그의 노래에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서 “야웨”란 단어를 쓰지 않고 “엘”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리고 삼상 5장과 삼하 6장에서는 법궤가 “하나님의 법궤”(아론 엘로힘; )라고 불리기도 하고 “야웨의 법궤”(아론 야웨; )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야웨”와 “엘로힘”이 사실상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야웨”란 단어와 “하나님”이란 단어가 때로는 같은 의미로 쓰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웨”가 하나님과 동의어로 쓰인 경우는 비단 사무엘상하와 같은 비교적 초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책들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동일한 예가 구약성경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책들 중의 하나인 역대상에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역대상 15장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야웨의 법궤”라는 말이 아무런 구별 없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역대하 23-24장, 그리고 31장에서는 “야웨의 집”(베이트 야웨;)과 “하나님의 집”(베이트 엘로힘;)이란 말이 번갈아 나온다. 또한 사37:20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에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는 “주만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의 뜻으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