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카네이션이 낯설다. 십 수년 동안 달아오던 익숙한 그 꽃 대신, 자녀의 영정에 하얀 국화를 바쳐야 하는 이처럼 잔인한 어버이날을 본적이 있는가? 세월호 참사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슬픔은 가시지 않고 분노는 더욱 차오른다. 사고 초기부터 우왕좌왕 무능한 정부의 대처는 여전하고 비리와 의혹들이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는 착석 사과, 대국민 사과가 아닌 대 국무위원 사과라고 지탄을 받았다. 그 미흡함을 인지한 듯 다시 한번 사과의 뜻을 내비쳤다. 이른바 초유의 예고 사과이다. 그런데 이 예고된 사과에서 대통령은 사과만 할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이 자리에서 국가개조 방법까지 함께 내 놓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국가 개조! 사건 수습과 재발 방지를 넘어서 이제는 국가 자체를 개조하겠다는 말이다. 국가개조라는 말은 민주주의에서 적합한 말이 아닐뿐더러 위험한 시도이다.
민주주의는 각 개인의 독립성을 중시한다. 반면에 국가 개조는 집단적 사고방식이다. 변화는 자율성에 기초하지만 개조는 강제력을 포함한다. 변화하는 데는 대화가 필요하지만 개조하는 데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 국가 개조론은 그 주체, 대상, 방법 등 모든 면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할 다분한 소지가 있다.
먼저 국가 개조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두 말할 것 없이 현 대통령 및 정부이다. 그러나 국가개조는 정치의 영역이 아닌 통치의 영역에서나 통하는 말이다. 18세기 계몽군주는 계몽주의 사상을 현실 정치에 접목시키려고 하였다. 신화적 세계관과 운명론적 사고에 빠진 국민을 이성과 과학, 합리적 사고로 바꾸겠다고 시도했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개혁은 결국 개조 대상의 미개함과 개조 주체의 우월성이 전제 된 것이다. 국민은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가를 뽑은 것이지 다스리는 통치자를 뽑은 것이 아니다. 국가 개조는 그런 면에서 결국 개인의 자율성 침해와 정권 경직성의 가속화 그리고 국가주의(파시즘)의 위험이 따라 올 수 밖에 없다.
개조의 대상도 문제다. 제 일차의 대상은 관료주의와 제도 개혁을 의미한다. 그러나, 안 그래도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소리를 듣는 판에, 이는 관료주의에 부는 또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는 일에 이미 익숙하다. 청와대로부터 강요되는 개혁은 그저 권력의 수평이동 및 새로운 관료주의 블루오션의 창출에 그칠 가능성이 다분하다.
또 하나의 개조의 대상은 국민이다. 만약 제도의 개혁만을 의미한다면 굳이 '국가개조'란 말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빈부격차, 수도권과 지방, 지역 감정, 세대 갈등, 진보와 보수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국론 통합, 국민의식 개조는 또 하나의 갈등을 유발할 뿐이다.
즉, 정부주도의 국가개조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당한 문제 제기 조차도 국론 분열 세력, 불순 세력, 종북 세력으로 매도 될 것이 뻔하다. 이는 결국 찬반 양쪽 모두 증오 정치, 선동 정치, 위기 조장으로 빠질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방법론적으로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개조든 변화든 모두 법률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야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입맛에 맞는 법률이 쉽게 통과 될 리는 없을 것이고, 그렇게 시간만 끌면 초조해지다가 결국은 가시적 성과를 내기 위해서 각 정부부처를 채근하고, 사정기관을 동원하고 정부의 정책에 호의적인 언론을 통한 프로파간다(선전)로 갈 수 밖에 없다. 그 순간 허울 좋은 국가 개조의 기치는 이미 물 건너 가는 것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국민은 충분히 성숙된 시민의식을 보여 주었다. 국가 개조는 그것을 부르짖는 사람들만 따로 모여서 해도 충분하다. 자기가 쓴 반성문을 피해자에게 강요하면, 그것은 반성문이 아니라 협박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