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장신대 김인수 총장
(Photo : ) 미주장신대 김인수 총장

한국에 주재(駐在)하는 선교사들이 오기 반세기 전에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한국을 다녀간 선교사 몇이 있다. 이들은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온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에 거주하면서 선교 사역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온 사람들로 한국교회 역사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들이다.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는 프러시아계 독일인으로 의사이며 목사였던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이다.

그는 1803년 7월 독일 포메라니아(Pomerania) 지방의 피리쯔(Pyritz)에서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 경건주의운동의 발상지였던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일찍이 선교사가 될 포부를 갖고 1826년 네덜란드 선교회 파송을 받고 동남아 자바 지방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사역에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차에, 불행히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안고 본래 의도한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1831년 요동반도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는 같은 해, 6개월에 걸쳐 중국 동해안과 만주로 전도 여행을 하였다. 그는 이 여행에서 많은 성과를 올리고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귀츨라프가 한국에 오게 된 것도 이 선교 여행에서의 성과 때문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천톤 급의 군함 로드 앰허스트(Lord Amherst)을 무역선으로 중국, 한국, 일본, 오키나와, 대만 등지로 교역을 트기 위한 항해를 준비하였다.

이 배의 선장이었던 휴 린제이(H. Lindsay)는 귀츨라프에게 통역, 선의(船醫), 선목(船牧) 등의 자격으로 승선해 달라는 요청을 한다. 귀츨라프는 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임으로 한국에 오는 첫 선교사로서의 기록을 남겼다.

로드 앰허스트 호는 1832년 2월 중국 마카오를 떠나 7월에 한국 서해안 황해도 백령도을 거쳐 충청도 홍주목만(洪州牧彎) 불모도(不毛島)에 도착한 후 고대도(古代島) 안항(安港)에 예인되었다.

선장은 그 지방 관리들을 통해 국왕 순조(純祖)에게 통상을 원한다는 청원서를 보냈다. 이 때 선장의 권고에 따라 귀츨라프가 전도용으로 갖고 온 한문 성경 두 권과 서양포(西洋布), 시진표(時辰表), 천리경(千里鏡) 등의 선물을 함께 보냈다.

서울로부터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는 한국 사람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관리들의 감시가 소홀할 때 귀츨라프는 섬에 상륙하여, 섬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성경과 의약품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그의 항해기에서 다음과 같이 한국인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준 사실을 기록했다.

“우리들은 해변에 상륙하여 큰 어선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정부 관리의 감시가 없는 해안이었으므로 어부들은 우리를 친절히 대하여 주었다. 내가 복음서를 몇 권 주었더니 그들은 너무 고마워 답례할 물건이 없음을 미안히 여기면서 잎담배 몇 개를 주었다.”

귀츨라프는 한국 사람들에게 한문 복음서를 전해 줌으로 성경을 전해 준 선교사로 기록된다.

귀츨라프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한국 교회사와 한국 역사에 뜻 깊은 일 두 가지를 한다. 한국 교회사에 뜻 깊은 일은 그가 주기도문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 일이다.

앰허스트호가 도착했을 때 마량진에서 관리들이 문정을 위해 배 위에 올라왔다. 그들이 검문을 마치고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일기가 불순하여 그 날 밤을 배 위에서 지내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문으로 된 주기도문을 한국어로 번역할 생각을 했다. 배에 올라온 홍주 목사(牧使) 이민회(李敏會)의 서생(書生) 양씨(梁氏)에게 한자로 주기도문을 써주고 한글로 그 옆에 토를 달아 번역하게 하였다. 이것이 부분적으로나마 한글로 성경을 번역한 첫 번째 일이다.

또 한 가지 한국사에서도 특기할 일은, 귀츨라프가 섬사람들에게 감자 씨를 주면서 그 심는 법과 재배법을 가르쳐 준 일이다. 귀츨라프는 섬사람들이 굶주림에 고통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그들의 식품으로 갖고 온 감자를 가져다가, 나누어 먹게 하지 않고, 해안에 둔덕을 만들어 100여 군데 심어 주면서 한문으로 그 재배법을 써 주었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외국의 식물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국법을 어기는 것이라며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귀츨라프는 이것은 좋은 식품이니 잘 재배하여 굶주림을 면하고 배불리 먹고 살라며 섬사람들을 설득하였다.

그가 떠나 후, 몇 개월이 지나 섬사람들이 둔덕을 파 보니 주먹만 한 감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섬사람들은 이것을 삶아 먹고, 구워 먹고, 튀겨 먹고, 생으로도 먹어 허기를 면하였다.

처음에 이것은 마령서(馬鈴署)라 불리다후에 감자라 불렀으며, 충청도 일대에 퍼져 나간 후,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귀츨라프는 감자를 당장 먹게 하지 않고, 재배하게 함으로써, “고기를 잡아주면서 먹게 하지 않고, 잡는 법을 가르쳐 준” 귀한 결과를 가져왔다.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던 우리 민족이 감자를 재배하여 배고픔을 모면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귀츨라프의 공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귀츨라프는 우리 민족에게 생명의 양식인 성경과 육신의 양식인 감자까지 주고 간 고마운 선교사로 기억되어야 한다.

귀츨라프는 섬사람들에게서 나는 악취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들의 머리에서, 입에서, 몸에서 옷에서 역한 냄새가 계속 풍겨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사람들의 삶에 무엇보다 비누가 절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누는 사람의 몸과 의복과 생활을 정화 시키는 귀한 물품이다. 성경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해 주는 생명의 말씀이요, 감자는 인간 육신의 삶을 이어주는 먹거리라면, 비누는 인간의 삶을 정화시키는 필수품이다. 인간에게는 영혼의 양식인 성경과 육신의 양식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육체도 정결해야 하는 법이다. 귀츨라프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요긴한 성경과 감자를 주고 갔다. 비록 비누는 주고 가지 못했지만, 마음 속으로 이 민족에게 비누를 주실 것을 소망하면서 떠나갔다. 이제 우리 민족은 이 세 가지를 다 소유하게 되었고,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육신의 먹거리 문제, 그리고 겉사람의 정결까지 유지하게 된 것은 선각자 귀츨라프 선교사의 은덕이라 아니라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도 꼭 기억해야 하는 귀한 분 중 한 분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