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국교회의 후손들로, 한국교회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 기독교가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보통 개신교는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에 제물포를 통해 들어오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럼 언제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 왔을까? 이것은 학자들 간에도 이론이 많다.
일부 학자들 간에 더러는 한국기독교의 시작을 경교(景敎)의 한국 도래로 보기도 한다. 그럼 경교란 무엇일까? 경교란, 중국 당나라 때 초기 기독교 이단 가운데 하나인 네스토리아니즘(Nestorianism)을 지칭한 것이다.
주후 4세기 초,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의 이스탄불) 교구 감독은 네스토리우스(Nestorius)였다. 그는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당시 교회들이 공통으로 인정하고 있던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어머니” (Christo-tokos)라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교회 안에 큰 논쟁거리가 되어, 주후 431년 에베소에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전교회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이집트의 한 수도원에 유폐된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 중 일부가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사를 양성하여 각지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7세기 초, 알로펜(아브라함)이란 선교사가 동료 선교사들과 더불어 인도를 거쳐 중국 땅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 태종 때였는데, 태종은 멀리 서역에서 온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알로펜은 기독교를 설명하면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고,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다. 그의 독생자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고, 우리는 세상에 “빛”이라 말씀 하였다고 설명하였다. 태종과 신료들은 이들이 빛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을 듣고, 이 종교가 “빛의 종교”(Luminous Religion) 즉 경교(景敎)라 명명하였다. 또한 페르시아에서 온 종교이므로 “파사교”(波斯敎), 이 종교의 근원지가 로마 즉 대진(大秦:중국에서는 로마를 대진이라 불렀다.)이라 하므로, “대진교”(大秦敎)라 부르기도 하였다.
태종은 알로펜에게 진국대법주(秦國大法主)라는 관직을 수여하고, 10도와 385주에 경교 사원 건립을 하명하였으며, 성탄절에는 향과 음식을 하사하고 축하해 주었다. 태종 이후의 황제들도 경교에 대해 호의적이어서 경교는 당나라에서 약 200년간 크게 번창하였다. 각 성에 성당이 건축되었고, 열성적인 전도인들에 힘입어 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태종 때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후, 무종이 등극하면서, 그는 중국에도 좋은 도(道)가 많은데, 왜 외국 종교가 판을 치느냐며 모든 외래 종교에 추방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왕성하게 퍼져 나가던 불교, 조로아스터교 등 외래 종교가 철퇴를 맞았다. 경교도 외래 종교였으므로 모든 성당이 폐쇄되고, 3천명 이상의 신부들이 추방을 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이로써 경교는 중국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경교가 중국에서 약 200년간 번창했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거의 1천년이 지난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1625년, 중국의 시안(西安) 근처에 사는 어느 농부가 밭을 갈다, 거대한 검은 대리석에 수많은 한자가 새겨진 비석을 발견했다. 이 비석은 경교와 한문에 뛰어난 경교사 아담(Adam, 景淨)이 황제의 윤허를 받아 비문을 제작하여 781년에 세운 것인데, 외래 종교 박해 시 누군가가 땅 속에 파묻어 둔 것이었다.
이 비문에는 주후 635년, 알로펜이 중국에 당도했고, 당시 당 태종의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과 그 때 당도 했던 알로펜을 위시한 수도사들의 이름이 시리아어로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으로 인해 경교가 중국에 당도했던 일과 200년간 선교가 흥왕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면 이 경교가 조선에 들어왔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만약 한국에 경교가 들어왔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한국 전래로 한국 기독교의 시발점이 주후 7-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될 터이다.
일부 학자들은 경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 근거는 당나라와 신라는 교역이 많아,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했고, 불교와 중국 문화를 공부하려는 유학생이 많이 드나들었고, 두 나라 조정 간에 협력 또한 긴밀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라와 당나라군이 연합한,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백제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봐서 경교가 당나라에 왕래하는 사람들에 의해 신라에 유입됐을 것이라 추정한다.
또 한 가지 근거는 1956년, 신라시대 사찰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하나 나왔다는 것이고, 관음보살상, 나한상 등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학계에서 인정한 사료(史料)가 필요하다. 어떤 곳에서 돌 십자가가 나왔다고 그것이 경교의 흔적이라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주관적이며, 불상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중국의 경교비와 같이 한국에 경교가 전래되었다는 직접적이고도 움직일 수 없는 사료가 나오기 전에는 경교의 한국 전래에 대해 단언 할 수 없다. 중국에서와 같이 지금부터 1천년이 지난 후 강원도 어느 산골 마을에서 경교비가 나온다면 그 때 가서 따져 볼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한국교회 시작을 경교 전래로부터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계속>
보통 개신교는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에 제물포를 통해 들어오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럼 언제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 왔을까? 이것은 학자들 간에도 이론이 많다.
일부 학자들 간에 더러는 한국기독교의 시작을 경교(景敎)의 한국 도래로 보기도 한다. 그럼 경교란 무엇일까? 경교란, 중국 당나라 때 초기 기독교 이단 가운데 하나인 네스토리아니즘(Nestorianism)을 지칭한 것이다.
주후 4세기 초,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의 이스탄불) 교구 감독은 네스토리우스(Nestorius)였다. 그는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당시 교회들이 공통으로 인정하고 있던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어머니” (Christo-tokos)라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교회 안에 큰 논쟁거리가 되어, 주후 431년 에베소에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전교회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이집트의 한 수도원에 유폐된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 중 일부가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사를 양성하여 각지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7세기 초, 알로펜(아브라함)이란 선교사가 동료 선교사들과 더불어 인도를 거쳐 중국 땅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 태종 때였는데, 태종은 멀리 서역에서 온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알로펜은 기독교를 설명하면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고,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다. 그의 독생자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고, 우리는 세상에 “빛”이라 말씀 하였다고 설명하였다. 태종과 신료들은 이들이 빛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을 듣고, 이 종교가 “빛의 종교”(Luminous Religion) 즉 경교(景敎)라 명명하였다. 또한 페르시아에서 온 종교이므로 “파사교”(波斯敎), 이 종교의 근원지가 로마 즉 대진(大秦:중국에서는 로마를 대진이라 불렀다.)이라 하므로, “대진교”(大秦敎)라 부르기도 하였다.
태종은 알로펜에게 진국대법주(秦國大法主)라는 관직을 수여하고, 10도와 385주에 경교 사원 건립을 하명하였으며, 성탄절에는 향과 음식을 하사하고 축하해 주었다. 태종 이후의 황제들도 경교에 대해 호의적이어서 경교는 당나라에서 약 200년간 크게 번창하였다. 각 성에 성당이 건축되었고, 열성적인 전도인들에 힘입어 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태종 때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후, 무종이 등극하면서, 그는 중국에도 좋은 도(道)가 많은데, 왜 외국 종교가 판을 치느냐며 모든 외래 종교에 추방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왕성하게 퍼져 나가던 불교, 조로아스터교 등 외래 종교가 철퇴를 맞았다. 경교도 외래 종교였으므로 모든 성당이 폐쇄되고, 3천명 이상의 신부들이 추방을 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이로써 경교는 중국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경교가 중국에서 약 200년간 번창했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거의 1천년이 지난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1625년, 중국의 시안(西安) 근처에 사는 어느 농부가 밭을 갈다, 거대한 검은 대리석에 수많은 한자가 새겨진 비석을 발견했다. 이 비석은 경교와 한문에 뛰어난 경교사 아담(Adam, 景淨)이 황제의 윤허를 받아 비문을 제작하여 781년에 세운 것인데, 외래 종교 박해 시 누군가가 땅 속에 파묻어 둔 것이었다.
이 비문에는 주후 635년, 알로펜이 중국에 당도했고, 당시 당 태종의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과 그 때 당도 했던 알로펜을 위시한 수도사들의 이름이 시리아어로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으로 인해 경교가 중국에 당도했던 일과 200년간 선교가 흥왕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면 이 경교가 조선에 들어왔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만약 한국에 경교가 들어왔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한국 전래로 한국 기독교의 시발점이 주후 7-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될 터이다.
일부 학자들은 경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 근거는 당나라와 신라는 교역이 많아,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했고, 불교와 중국 문화를 공부하려는 유학생이 많이 드나들었고, 두 나라 조정 간에 협력 또한 긴밀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라와 당나라군이 연합한, 나·당연합군이 고구려, 백제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봐서 경교가 당나라에 왕래하는 사람들에 의해 신라에 유입됐을 것이라 추정한다.
또 한 가지 근거는 1956년, 신라시대 사찰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하나 나왔다는 것이고, 관음보살상, 나한상 등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학계에서 인정한 사료(史料)가 필요하다. 어떤 곳에서 돌 십자가가 나왔다고 그것이 경교의 흔적이라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주관적이며, 불상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중국의 경교비와 같이 한국에 경교가 전래되었다는 직접적이고도 움직일 수 없는 사료가 나오기 전에는 경교의 한국 전래에 대해 단언 할 수 없다. 중국에서와 같이 지금부터 1천년이 지난 후 강원도 어느 산골 마을에서 경교비가 나온다면 그 때 가서 따져 볼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한국교회 시작을 경교 전래로부터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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