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종말 소동

2012년 12월 21일의 대종말 소동이 지나갔다. 필자는 이미 2012년의 지구종말 소동에 대해 올 초 그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에녹이나 엘리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히 9:27). 종말이나 재림은 그 시기와 양태(樣態)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예언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깨어 있음”(마 24:42)이 중요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시한부종말론에 유혹 당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종말이 밤에 올 것이라는 착각

그런데 시한부종말론자들의 행태를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종말이 밤에 올 것이라는 착각이다. 1992년 10월 28일 휴거 소동 때에도 사람들은 12시 자정을 기다렸다. 그럼 우리나라 사람만 밤에 데려감을 당한단 말인가? 유럽은 아직 오후 시간대요 미 대륙은 아침인 시간이다.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이 잘 알려진 오늘날에도 자기들만의 자정 휴거를 기다린다는 말인가? 자정을 미련하게 고집(?)하는 것은 시한부종말론자들이 왜 어리석은 자들인가를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오로지 ‘밤’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시한부종말론자들은 성서의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는 성서근본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종말은 밤에 오는가?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주로 마태복음(24장)과 누가복음(17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그 날 “밤”(눅 17: 34)이라는 문자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말 모든 종말은 밤에 오는 것일까?

종말과 관련된 예수님 비유 가운데 맷돌 비유가 있다. 매(욥 31:10; 마 24: 41; 눅 17:35)와 맷돌(구약 10회, 신약 계시록에 2회)은 성경에 10여 회 등장하는 단어이다. 민수기에 보면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리므로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을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맷돌에 만나를 언제 갈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표현이 없으니 아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필요에 따라 만나를 갈았을 거라고 보인다. 다만 기름이 고가품(高價品)이었던 광야의 정황상 등불을 밝히는 경우는 특별한 경우(종교적, 군사적, 비상시 등)에만 활용했다고 볼 때 주로 낮에 맷돌을 갈았을 거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수님 당시 맷돌질은 출애굽 당시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갈 때 사용하던 때와 달리 예수님 당시 맷돌질은 여자들 몫이었고 또한 노예들(주로 여자 노예)의 몫이었다. 이때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맷돌을 갈았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과거 주석(註釋)들은 누가복음 17장 34절 “밤”이라는 단어에 병행하기 위해 밤에 맷돌을 갈았다는 무리한 해석들이 있었고 이것을 현대 주석들도 무심코 답습한 경향이 있다. 값비싼 등불을 켜 놓고 무리하게 노예들에게 밤에 맷돌질을 강제시켰다는 해석은 34절의 ‘밤’에 집착한 조금은 어색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맷돌질은 밤낮의 때를 가리지 않고 필요시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상황이 전혀 다르기는 하나 당연히 우리나라 맷돌질 풍습도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4장 40절에 보면 밭에 두 사람이 있으매 한 사람만 데려감을 당한다고 했다. 누가복음 17장 34절이 남자들의 밤의 정황을 말하고 있는 반면, 농사일이 주로 남자의 일이고 낮의 일과임을 볼 때, 마태와 누가가 말하는 두 구절을 참조할 경우, 심판의 돌발 상황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발생할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 구절이 밤이냐 낮이냐가 중요하다거나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역설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다만 자연스럽게 지구 자전과 해석 상 아무런 모순이 발생하지 않고 조화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구절의 중요성은 ‘종말의 밤’이나 ‘지구 자전’이 아닌 다른 데 있다. 이들 문장의 단어(마 24:4041, 눅 17:34-35)들이 수동형을 취하고 있음을 볼 때, 이 문장은 데려감을 당하고 남겨지는 사건의 중심이,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께 달려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은 밤에 종말이 있으니 깨어 있으라고 말한 게 아니었다. 또한 지구는 자전하고 있으니 그렇게 알라는 구절도 아니었다. 이 구절은 종말 심판의 주관자가 인간이 아닌 주님이므로 언제든 너희는 주 안에서 “깨어 있으라”는 충고였던 것이다.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