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대전에서 끔찍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제 40밖에 안 된 가장이 사업 실패로 낙심한 나머지 동갑내기 부인과 17살 딸과 15살 난 아들을 공기총으로 쏘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이 그것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이렇게 밖에 사랑을 표현할 수 없어 미안하다고 함께 죽은 자식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식 사랑의 방법을 몰라도 한참이나 몰랐던 사람이었음을 스스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몸 건강한 젊은 한 가족이 사업 실패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다 죽어야 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그 보다 더 절망적인 여건에서도 얼마든지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생명과 삶에 대한 바른 인식과 가치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모든 것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2003년 11월에 미국 대통령인 죠지 부시가 텍사스 달라스에서 옥 플리크 바이블센터 개관식에 참석하여 간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옛 추억을 털어 놓고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젊은 청년 시절에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더 이상의 희망도 꿈도 없는 완전히 패인과 같이 버려진 그런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자신과 같은 버려진 인간에게 기대를 갖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나를 위해 생명을 대신 버려 주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좌절과 절망에서 소망과 꿈의 사람으로 변화를 받았고 마침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삶의 모습입니까? 그러므로 신앙은 액세서리와 같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신앙의 곧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가장 큰 사도로 활약하였던 사도 바울은 “너희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았으니……. 감사를 넘치게 하라”(골2:6-7)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똑 같은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은 삶이 아름답게 발전하고 변화될 수 있으나 원망하고 불평하며 절망하게 되면 소중한 생명까지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인천에서 있었던 모녀 동반 자살 사건도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오죽하였으면 젊은 여인이 자기 배로 낳은 사랑하는 자식 셋을 아파트 밖으로 내던지고 자신도 뛰어 내려 자살하였겠는가? 고 동정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자식 사랑의 방법을 달리했더라면 그렇게 허망하게 소중한 생명을 희생시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을 제처 놓고 하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낳았기 때문에 내 자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생명은 각 자가 독립된 개체의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비록 그것이 자신의 배로 낳은 자신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을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했고 그러므로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대전에서 있었던 사건이나 인천에서 있었던 이 사건들은 한 결같이 그릇된 자식 사랑에서 비롯된 너무나도 끔찍하고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바로 배워야 하고 또한 바른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레나 마리아와 같은 사람을 머리에 떠올려 본다면 사람의 의지와 신앙의 열매가 그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만들 수 있는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스웨덴에서 태어난 그녀는 날 때부터 두 팔과 한쪽 다리가 없는 기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몸으로 노력하고 일어서고 공부하고 하나님을 믿어 전 세계적인 복음송 가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 손에 붙잡혀 쓰임 받는 귀한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경제가 어렵다는 고통도 작은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스스로 요동하기 어려운 사람의 불행에 비한다면 그거야 말로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건강한 몸만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든지 움직이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촌음이라도 아껴서 이처럼 나약한 사람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심어 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수제자 디모데에게 부탁하기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만금 보다 더 귀한 이웃 사랑의 가치가 되기 때문에 바울은 그렇게 살았고 또한 그렇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불행한 이웃들을 향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중한 생명들이 바로 우리들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사랑에 관해 무지한 연고로 소중한 자식들을 죽음의 길로 이끌었던 그러한 불행한 사람들에게 지혜자는 지금도 외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