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남독녀를 둔 목사님이 계셨다. 하나뿐인 딸인지라 너무나도 애지중지 키웠다. 어느덧 성숙했는가 싶더니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 하겠다고 한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참으로 괜찮은 사람을 점찍어 두고 내심 사위로 삼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만 못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한사코 결혼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한 가지 다짐을 해 둔다.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고. 그러자 딸은 호언장담을 한다. “어떠한 잘못이라도 용서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사랑하노라”고. 그러나 딸은 부모님의 승낙이 속히 나지 않자 그만 집을 나가 단 둘이서 결혼하고 만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다음 친정과 인연을 끊다시피 살고 있던 딸은 결국 남편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남편이 자신의 고등학교 친구와 같이 정을 통하고 있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왔으나 마땅히 갈 곳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염치없지만 친정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여전히 찬송소리가 흐르고 따뜻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다. 아버지는 실망하고 되돌아 온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아버지는 젊었을 때 너의 어머니와 결혼을 하였으나 네 어머니의 언니와 사랑에 빠져 큰 죄를 범하였단다. 그러나 네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도 조금도 실망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나는 사람과 결혼하였지 하나님과 결혼한 것이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으니 당신도 역시 사람임에 틀림이 없군요’하면서 오히려 위로해 주면서 나를 용서해 주었단다.

그래서 나는 그 때부터 깊이 회개하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여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단다. 그러니 너도 네 남편을 용서해 주거라. 너는 사람과 결혼하였지 하나님과 결혼한 것은 아니지 않니?” 이 말을 들은 딸은 아버지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남편을 용서해 줄 것을 다짐하고 새롭게 가정을 회복시키게 된다.

미우라 아야꼬의 [원죄]에 나오는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만물이 아름답게 결실하여 조물주를 기쁘게 하는 복된 가을이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고 결단할 수 있다는데 있다. 우리는 모두가 다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들이다. 서로 용서해 주고 참아주며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질그릇의 소박한 맛이 나게 되는 것이다. 끝까지 물고 물며 싸우는 삶은 인감 됨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짊어지는 수치스러운 모습이다. 한번 더 심호흡을 하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용서 못할 일도 없고 사랑하지 못할 대상도 없다. 절대자 앞에서 사는 우리 인생들의 모습이란 어차피 허물투성이인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도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데 우리들이 감히 누굴 정죄하고 책망할 수 있겠는가? 가을비처럼 촉촉이 젖어드는 사랑의 가슴을 안고 모든 이들을 포근히 감싸 안을 수 있는 그런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바로 그와 같은 사랑 안에 부모님도 계시고 형제 자매도 머물며 토끼 같은 자식들도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사랑 안에서 사는 삶이 행복이다. 사랑이 없으면 부모형제도 원수가 되나 사랑의 눈으로 보면 원수도 부모형제가 된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의 바로미터는 바로 이 사랑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랑은 용서하는데서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니 용서는 사랑보다 더 위대한 요소인 것이다. 용서로 비워진 마음에 사랑을 담아 행복을 누리게 되는 그런 멋을 이 가을에 한번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다. 가을을 주신 하나님께 작은 보답이라도 드릴 수 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