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존 칼빈(1509-1564) 탄생 500주년을 전후해 전세계적으로 칼빈에 대한 다양한 서적들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에도 <교리, 예배, 삶의 균형을 추구한 사람 칼빈(부흥과개혁사)>, Happy Birthday, 칼빈(킹덤북스)>, <요한네스 칼빈의 생애와 사역(한들출판사)> 등이 국내 시장에 선보였다.

이 가운데 <존 칼빈의 유산(P&R)>은 현대 사회에 미친 칼빈의 영향을 다루는 책이다. 저자 데이비드 W. 홀은 존 칼빈이 바꾼 현대문화의 10가지 방향을 살펴보고, 칼빈의 생애와 평가에 대해 탐구한다.

칼빈은 먼저 귀족적 엘리트를 위주로 제한된 교육을 실시하는 중세 교육을 타파하고, 1559년 제네바에 아카데미를 설립함으로써 도시 다수 대중을 위한 시험적 교육을 시도한다. ‘현대적 공교육의 선구자’ 칼빈의 아카데미 설립은 그의 사회 기여 중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는 항목 중 하나다. 7학년으로 이뤄진 이 공립학교는 첫 해에 280명이 등록했고, 신학부는 3년만에 162명 재적으로 성장했다. 칼빈 서거 이후에는 컬리지 학생 1200명 중 신학부가 300명에 달했는데, 유럽 교육기관들 중 그 정도 빠른 성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기 위한 ‘구제기금’ 마련도 그의 업적이다. 칼빈은 교회의 동정심이 임명된 집사들을 통해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적합한 도움이 제공되도록 실질적 계획을 도출하는 등 오늘날 민간 자선활동의 전형적 형태를 보였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분리파 박해를 피해 도망친 프랑스 거류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처음 고안된 구제기금으로 집사들은 고아와 노인, 무능력자들의 거처를 마련하고 임시보조금이나 직업훈련을 제공했다.

합의제 통치체제, 권력의 분산 등 정치제도 개혁에도 기여했다. 칼빈은 정부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오랫동안 힘써 주장했고, 사무엘상 8장 설교와 주석에서 독재의 위험성, 정부에 대한 적정한 제한 필요성, 인간 정부 위에 있는 하나님 주권의 위치에 관해 논했다. 칼빈은 출애굽기 18장에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제안한 부장 제도를 대의공화제 형태로 받아들였고,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 이론보다 2세기 앞서 1543년 보호규약에서 지방정부 또는 의회가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없도록 권력 분산을 꾀했다.

이외에 십계명을 윤리의 기둥으로 삼으면서 이러한 도덕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교회가 교회되도록 하기 위해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방해 없이 목회자 교육과 도덕을 관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오직 성직자들에게만 해당되던 직업에서의 소명을 확대해 평범한 직업이 지니는 신성함을 강조, 의학과 법률·교육 분야, 상업과 유통업 등 산업 전반을 귀하게 여겼다.

칼빈주의가 전파되는 곳 어디든 자유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선호 역시 퍼져 나갔고, 공예배에서 사용하도록 고안된 음악을 당시 일상 언어로 번역하면서 시편 찬송을 신앙 고백의 기회로 제공했다. 칼빈의 제자들은 일상어를 통한 예배음악이 세대를 이어가며 신앙을 미래로 이어지게 하리라 봤다. 또 인쇄술을 이용한 출판물을 적극 사용·발전시켜 새로운 사상과 행동계획을 퍼뜨리는 수단으로 삼았다.

저자는 “존 칼빈이 남긴 자유의 유산 및 민주주의 사회가 열리도록 기여한 업적은 마땅히 인정돼야 할 것”이라며 “그는 신학자 이상의 인물이었고, 그의 영향력은 교회를 훨씬 넘어선 곳까지 펼쳐졌다”고 말했다.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에 관하여 향후 천년이라는 맥락에서 평가한다면, 칼 마르크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알버트 아인슈타인, 빌 게이츠, 헨리 포드 등의 인물들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사람들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

저자는 이후 2장에서 존 칼빈의 생애를 간략히 다루고, 3장에서는 스펄전과 존 맥아더, 제임스 패커와 존 웨슬리 등 다양한 교파들이 평가하는 칼빈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칼빈은 특정 교파나 종교적 전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며 “다양한 사건의 모습들로 나타나는 칼빈의 생애와 문화에 끼친 그의 공헌은 ‘신선하고, 대담하며, 최신 유행에 어울리는 칼빈주의’라는 C. S. 루이스의 표현이 잘 말해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