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비 구비 구릉을 타고 돌아
찾아 온 촌락 마을 한편 구석 지
돌무덤 섶 앞에 선다.
건너 언덕은 가지런히
작은 총포를 엎드려 놓은 듯
포도(葡萄) 줄기 나무가
앞날의 풍요를 예측 하고서
경작의 포오즈가 싱그럽다.
하늘 과 땅이 흔들리듯이
너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肺音을 가라앉힌다.
세 번의 음성으로,
사무엘은 귀 기우려 몸 가다듬는데,
오늘의 이 온 몸뚱이마저 그 경악(驚愕)에
바닥에 둥글어 몸 내던진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꿈틀거림
땅을 기면서 가르면서
새로운 생명의 작업(作業)은 시작되고
보이지 않는 세밀한 움직임으로부터
때로는 요동치는 몸부림으로도 지내 쳐서
대리석 끌 질 소리로
묵묵히 떠오르는 그림자
숱한 가루들이 부스러뜨려 떨어지면서
징 다듬는 소리 메아리에
命令의 한 大長程으로
자리 잡혀져 가는
나의 作業場은
하나의 그 부름을 통해서
열어져 가는 장거(狀擧)의 무계 되어
아침의 떠오르는 눈부신 해야. 해야_
그 자리, <실로>앞에서 자지러드는 내 몸 속의 세포의 소동이 있었습니다. 무슨 음성이 내게도 들려 올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돌무덤으로 폭삭 내려앉은 古代의 그림자이지만, 거기 나는 엄숙한 부름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나는 무슨 새로운 作業의 시작을 豫感했습니다. 거기 덥혀있는 돌멩이 하나하나에서 튀어 오르는 광채같은 것이 내 눈에는 보여 왔습니다. 아마도 그 때, 나에게는 바울의 다메섹 途上 山頂의 엄숙한 그런 광채 같은 것이 내게도 느껴왔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잔잔함이 내 깊은 골수 구석구석으로 차츰 차츰 파고 들어왔습니다. 어린 사무엘의 가슴에 담겨졌었던 그런 영적 각오 같은 것이라고 난 感知했습니다. 건너편 언덕에는 멀리 총대 줄지어 세워 놓은 듯 빼곡이 서 있는데, 안내자에게 물으니, 포도줄기 나무가 빼곡이 서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세상이 지금도 삭막하게 소란하다고들 아무리 떠들어 대지만은, 나는 이 같은 靈的 感知가 인류의 어느 등줄기를 타고 질서(秩序)롭게 움직여 가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세상을 줄기차게 흘러온 역사에는 절대적인 정의가 뼈대를 이루어 왔음을 면면히 보았고 앞으로도 보여져 가기 때문입니다.
1946년 남산골 과 필동골목 더듬는 소년..
(마지막 連作 詩 4)( 1944~1950년 祖國의 겪었던 슬픔 머금은 작은 이야기_ )
유리창도 다 깨져 나간 기관차 객실
덜컹이면서 캄캄한 밤 중, 등불도 없이 엉거주춤
사람 사람들 틈에 끼어, 한 구석 끼어 자리하고
원주역을 떠나는 밤 새벽의 解放 汽車
울청 거리면서 드나드는 굴 속 지날 때면
메케한 연기가 그대로 온 몸을 둘러 코를 찌르는데
처음에야 구역질 동반해대지만
잠시 후, 오히려 연기 맛이 달큼히 폐를 감돌아
동트는 淸凉里驛에 닿는다.
참 오랜 동안, 아니지
한 해 전만 해도, 서민 나부랭이 소년이야
가까이 生活化 하던 거리電車가
꿈 속 거대한 장난감으로 눈 안에
움직이며 가득 차 왔어,
어느 새, 단 숨에, 지금은 퇴계로이지만
일제 말에야 大化町 입구로, 걸어 걸어
얼마 전까지야 그네들 朝鮮征服 宮庭인가로 불렸던,
그 시절에는 수도극장 윗녘 골목골목 돌아
筆洞 동네 남산 밑자락
으리으리, 어마어마한 대형 큰 집 적산가옥
물어물어 찾아 들었어,
일본식 발음대로
아아~ 大化町 二町目 일백이십사_
일 년 반 만에 만난 형과 노래 만들어 부르면서..
성벽처럼 비탈 길 높은 돌 절벽 담을 끼고
대문 들어서자, 여기가 내가 살아갈 3년 반 소년의 꿈 집.
커다란 단풍나무
반질한 나무 밑동에 매달린 여린 잎가지들 그늘 아래를 지나
마루 방 현관으로 들어서자
내 밑 동생 여섯 살 배기가, 한 해 사이
어찌나 자랐는지, 난 옆 집 마실 온 아이인 줄 알았어.
집은 열세 칸의 방이 널려 있고
굵은 밤나무가 다섯 구루
밑동 굵은 벚나무가 담 장 안으로 둘러 열아홉 구루
헐렁한 二層 둘러 두른 대형 유리문 때문에
방 안 말소리조차 울려 나가는
소위 당시 <대화정> 집.
그 때, 나는 집 뒤 南山과 친 해지는 아이였었어.
산비탈, 길 없이 가시 덩풀 헤치고 넘으면,
남대문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어설픈 야구장이 누었고,
4학년에 입학한 남산초등학교
까만 고무신 신고
네모 돌바닥 언덕 퇴계로 거리에서 꺾어 조금 오르면
네모 교정 대문 지나 디귿 자 형 3층 하얀 건물 셋
남산초등학교- 4학년 반_
짝 이름은 지금도 생각나는 우 도근..
당시 초등학교 축구 선수 황가 성인가, 무엔가..
맹 광호.. 이 인규.. 이름들도 내, 아직 머리에 남아 있네,
종로 5가 행 길 가엔 말똥냄새 나는 馬車가
말발굽 소리 요란히 작은 電車 길 통행 함께
버스 대신 출근 길 거리차로 행세를 하고,
필동 친구 집 아침 길엔 때로는
그 때 거의 눈에 안 띠는 시보레(쇄볼레) 몸통 긴 자가용차에
친구 따라 몸 싣고, 그 아버지 따라,
어깨 피며 우린 학교 향해 나섰고,
지금쯤 다들 어디 메, 나처럼 칠 순 중반 이르러
거닐 고 있을 테지..
강당의 음악교실 시간, 호동왕자 연극반 시간 마치면,
어둑어둑 찾아 돌아오는 높은 돌 절벽 골목 집
온실은 닭장으로 바꾸어, 열네 마리 하얀 닭을 기르고
이 층으로 오르면, 남산 소나무 울창하게
한 눈 안에 들어오는데,
하지만, 한 겨울에도 불씨 없는 차가운 다다미 방
이불 쓰고 형 등 맞대, 몸 녹이면서, 단성사, 국제극장
라크린 흑백서부 영화 이야기 밤새도록
이불 속에서 나눴었지, 그 방 안_
나, 사랑하여 주는 어른 없는 아이는
언제나 맘 뒤안길에서 곁눈질 올려 처다 보면서
허황하면서도 아기자기 꿈, 머리 안에 펼치면서 그렇게
사나이 소년은, 별세계의 외로운 꿈 다듬어가며 자라갔지_
<낡아진 童話詩集> 책장은 여기에서 마지막 장을 넘겨 닫습니다. 아마도 祖國 解放 맞고서 얼마 흐른 후, 鐘路通 거리에, 말똥 흘리면서 馬車거리차가 나 단겼다는 기억을 하는 분,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47.. 48.. 49.. 50년에 그래, 그 서울 거리에는 무서운 격랑이 휘몰아 친 후, 회색 허연 뼈대만 남겨놓는 피 냄새 번지는 씰루엩 그림자로 총탄 맞은 뼈다귀 기둥 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崔相鉉 목사 아버지, 북녘 거치른 사람들 손아귀에 잃고서, 형, 누나는 다 어디로 떠나버렸는지.. 겨드랑이에 京鄕신문, 새벽에 15장 받아서는 수도극장 곁 신문사 담장골목 뛰처 나와 돈암동 까지 뛰쳐 달리면서 원남동 창경원 담장 새벽바람 반향소리 되받으면서, 경향신문요! 경향신문 사세요! 사세요! 소리치면서 뛰었지만, 아침녘 집에 돌아오면 10장정도가 그대로 겨드랑이에 남아져서, 혼자 창피해 하며, 옷장 뒷 녘으로 던져 넣어버려 쌓이곤 했는데, 아~ 지금도 간혹 씩은, 아스라한 비스듬 非情함의 옆 웃음이 얼굴 곁으로 긋고 가군 합니다.
찾아 온 촌락 마을 한편 구석 지
돌무덤 섶 앞에 선다.
건너 언덕은 가지런히
작은 총포를 엎드려 놓은 듯
포도(葡萄) 줄기 나무가
앞날의 풍요를 예측 하고서
경작의 포오즈가 싱그럽다.
하늘 과 땅이 흔들리듯이
너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肺音을 가라앉힌다.
세 번의 음성으로,
사무엘은 귀 기우려 몸 가다듬는데,
오늘의 이 온 몸뚱이마저 그 경악(驚愕)에
바닥에 둥글어 몸 내던진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꿈틀거림
땅을 기면서 가르면서
새로운 생명의 작업(作業)은 시작되고
보이지 않는 세밀한 움직임으로부터
때로는 요동치는 몸부림으로도 지내 쳐서
대리석 끌 질 소리로
묵묵히 떠오르는 그림자
숱한 가루들이 부스러뜨려 떨어지면서
징 다듬는 소리 메아리에
命令의 한 大長程으로
자리 잡혀져 가는
나의 作業場은
하나의 그 부름을 통해서
열어져 가는 장거(狀擧)의 무계 되어
아침의 떠오르는 눈부신 해야. 해야_
그 자리, <실로>앞에서 자지러드는 내 몸 속의 세포의 소동이 있었습니다. 무슨 음성이 내게도 들려 올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돌무덤으로 폭삭 내려앉은 古代의 그림자이지만, 거기 나는 엄숙한 부름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나는 무슨 새로운 作業의 시작을 豫感했습니다. 거기 덥혀있는 돌멩이 하나하나에서 튀어 오르는 광채같은 것이 내 눈에는 보여 왔습니다. 아마도 그 때, 나에게는 바울의 다메섹 途上 山頂의 엄숙한 그런 광채 같은 것이 내게도 느껴왔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잔잔함이 내 깊은 골수 구석구석으로 차츰 차츰 파고 들어왔습니다. 어린 사무엘의 가슴에 담겨졌었던 그런 영적 각오 같은 것이라고 난 感知했습니다. 건너편 언덕에는 멀리 총대 줄지어 세워 놓은 듯 빼곡이 서 있는데, 안내자에게 물으니, 포도줄기 나무가 빼곡이 서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세상이 지금도 삭막하게 소란하다고들 아무리 떠들어 대지만은, 나는 이 같은 靈的 感知가 인류의 어느 등줄기를 타고 질서(秩序)롭게 움직여 가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세상을 줄기차게 흘러온 역사에는 절대적인 정의가 뼈대를 이루어 왔음을 면면히 보았고 앞으로도 보여져 가기 때문입니다.
1946년 남산골 과 필동골목 더듬는 소년..
(마지막 連作 詩 4)( 1944~1950년 祖國의 겪었던 슬픔 머금은 작은 이야기_ )
유리창도 다 깨져 나간 기관차 객실
덜컹이면서 캄캄한 밤 중, 등불도 없이 엉거주춤
사람 사람들 틈에 끼어, 한 구석 끼어 자리하고
원주역을 떠나는 밤 새벽의 解放 汽車
울청 거리면서 드나드는 굴 속 지날 때면
메케한 연기가 그대로 온 몸을 둘러 코를 찌르는데
처음에야 구역질 동반해대지만
잠시 후, 오히려 연기 맛이 달큼히 폐를 감돌아
동트는 淸凉里驛에 닿는다.
참 오랜 동안, 아니지
한 해 전만 해도, 서민 나부랭이 소년이야
가까이 生活化 하던 거리電車가
꿈 속 거대한 장난감으로 눈 안에
움직이며 가득 차 왔어,
어느 새, 단 숨에, 지금은 퇴계로이지만
일제 말에야 大化町 입구로, 걸어 걸어
얼마 전까지야 그네들 朝鮮征服 宮庭인가로 불렸던,
그 시절에는 수도극장 윗녘 골목골목 돌아
筆洞 동네 남산 밑자락
으리으리, 어마어마한 대형 큰 집 적산가옥
물어물어 찾아 들었어,
일본식 발음대로
아아~ 大化町 二町目 일백이십사_
일 년 반 만에 만난 형과 노래 만들어 부르면서..
성벽처럼 비탈 길 높은 돌 절벽 담을 끼고
대문 들어서자, 여기가 내가 살아갈 3년 반 소년의 꿈 집.
커다란 단풍나무
반질한 나무 밑동에 매달린 여린 잎가지들 그늘 아래를 지나
마루 방 현관으로 들어서자
내 밑 동생 여섯 살 배기가, 한 해 사이
어찌나 자랐는지, 난 옆 집 마실 온 아이인 줄 알았어.
집은 열세 칸의 방이 널려 있고
굵은 밤나무가 다섯 구루
밑동 굵은 벚나무가 담 장 안으로 둘러 열아홉 구루
헐렁한 二層 둘러 두른 대형 유리문 때문에
방 안 말소리조차 울려 나가는
소위 당시 <대화정> 집.
그 때, 나는 집 뒤 南山과 친 해지는 아이였었어.
산비탈, 길 없이 가시 덩풀 헤치고 넘으면,
남대문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어설픈 야구장이 누었고,
4학년에 입학한 남산초등학교
까만 고무신 신고
네모 돌바닥 언덕 퇴계로 거리에서 꺾어 조금 오르면
네모 교정 대문 지나 디귿 자 형 3층 하얀 건물 셋
남산초등학교- 4학년 반_
짝 이름은 지금도 생각나는 우 도근..
당시 초등학교 축구 선수 황가 성인가, 무엔가..
맹 광호.. 이 인규.. 이름들도 내, 아직 머리에 남아 있네,
종로 5가 행 길 가엔 말똥냄새 나는 馬車가
말발굽 소리 요란히 작은 電車 길 통행 함께
버스 대신 출근 길 거리차로 행세를 하고,
필동 친구 집 아침 길엔 때로는
그 때 거의 눈에 안 띠는 시보레(쇄볼레) 몸통 긴 자가용차에
친구 따라 몸 싣고, 그 아버지 따라,
어깨 피며 우린 학교 향해 나섰고,
지금쯤 다들 어디 메, 나처럼 칠 순 중반 이르러
거닐 고 있을 테지..
강당의 음악교실 시간, 호동왕자 연극반 시간 마치면,
어둑어둑 찾아 돌아오는 높은 돌 절벽 골목 집
온실은 닭장으로 바꾸어, 열네 마리 하얀 닭을 기르고
이 층으로 오르면, 남산 소나무 울창하게
한 눈 안에 들어오는데,
하지만, 한 겨울에도 불씨 없는 차가운 다다미 방
이불 쓰고 형 등 맞대, 몸 녹이면서, 단성사, 국제극장
라크린 흑백서부 영화 이야기 밤새도록
이불 속에서 나눴었지, 그 방 안_
나, 사랑하여 주는 어른 없는 아이는
언제나 맘 뒤안길에서 곁눈질 올려 처다 보면서
허황하면서도 아기자기 꿈, 머리 안에 펼치면서 그렇게
사나이 소년은, 별세계의 외로운 꿈 다듬어가며 자라갔지_
<낡아진 童話詩集> 책장은 여기에서 마지막 장을 넘겨 닫습니다. 아마도 祖國 解放 맞고서 얼마 흐른 후, 鐘路通 거리에, 말똥 흘리면서 馬車거리차가 나 단겼다는 기억을 하는 분,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47.. 48.. 49.. 50년에 그래, 그 서울 거리에는 무서운 격랑이 휘몰아 친 후, 회색 허연 뼈대만 남겨놓는 피 냄새 번지는 씰루엩 그림자로 총탄 맞은 뼈다귀 기둥 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崔相鉉 목사 아버지, 북녘 거치른 사람들 손아귀에 잃고서, 형, 누나는 다 어디로 떠나버렸는지.. 겨드랑이에 京鄕신문, 새벽에 15장 받아서는 수도극장 곁 신문사 담장골목 뛰처 나와 돈암동 까지 뛰쳐 달리면서 원남동 창경원 담장 새벽바람 반향소리 되받으면서, 경향신문요! 경향신문 사세요! 사세요! 소리치면서 뛰었지만, 아침녘 집에 돌아오면 10장정도가 그대로 겨드랑이에 남아져서, 혼자 창피해 하며, 옷장 뒷 녘으로 던져 넣어버려 쌓이곤 했는데, 아~ 지금도 간혹 씩은, 아스라한 비스듬 非情함의 옆 웃음이 얼굴 곁으로 긋고 가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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