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언론은 온통 Virginia Tech 사건을 연일 다루고 있다. TV, Radio, 신문 어디든지 조승희 군의 살인에 대한 보도를 볼 수 있다. 그만큼 미국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충격을 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살인의 범인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는 긴장감이 돌고 있다. 아마도 우리 민족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관심이나 긴장감은 훨씬 덜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조승희 군이 영주권자라 해도, 여전히 한국 시민으로 남아 있는 한 비록 미국에 일찍 건너와 한국인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 살았다 해도 우리와 무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이민자라는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우리의 시각으로 조승희 군을 바라봄으로 이민 1세들의 아픔을 넘어 1.5세와 2세의 가슴속에서 흐르는 눈물이 무엇인지를 봐야 할 것이다. 이민 1세들이야 미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고독이니 외로움이니 하는 단어 자체가 사치스런 장식품에 불과할지 모른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Two Jobs, Three Jobs을 뛰다 보니 늘 몸이 피곤하여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어떻게든 자식들 잘 가르치고, 버젓한 집 한 채 마련하여 보란 듯이 살날을 그리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더구나 신분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을 하다 보니 모든 것이 어렵지만, 내일을 생각하며 그것도 참아냈다. 바쁜 와중에서도 교회에 가서 자식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 기도로 자식들을 위해 제대로 해 주지 못하는 부모의 아픈 마음을 위로받았다. 그렇게 살며 키워온 자식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조승희 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1세들이 열심히 일하고, 그 뿐만 아니라 자식 세대를 위해 모든 희생을 다 한다고 했다. 그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부모로써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을 했는데, 실상 받아들이는 입장에 서 있는 1.5세 2세들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돈 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사이를 이어주는 대화나 교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교감이 없이 청소년기를 지내면서 마음은 메말라지고, 알게 모르게 학교와 또래 집단에서 시달리는 언어의 장벽과 유색인종으로서 당하는 차별로 가슴에 멍이 들게 된다.
그 아픔을 달랠 곳이 없다보니 겨우 한다는 것이 컴퓨터 오락이고, 그나마 성격을 겉으로 표출하는 적극적인 청소년들은 그와 통하는 무리를 형성하여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풀지만, 소극적인 성격의 청소년들은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점점 들어가게 되어 겉모습은 멀쩡한데 실제는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게 살아간다. 그 단절의 정도가 점점 깊어지게 되어 결국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폭발이 된다. 조승희 군의 사건은 이런 결과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식 세대들을 위해 온 인생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다 주었으니 우리 할 일을 다 했다고 한다. 의사도 잘 통하지 않는 자식을 앉혀 놓고 "내가 얼마나 너를 위해, 우리 식구들을 위해 고생한 줄 아냐,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꿈은 네가 버젓하게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해도 과연 자식들이 그 말을 자신을 위해 고생했다는 아버지, 어머니의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지 의문이다.
1세대들이 하루하루 살기 위해 몸부림 칠 때, 힘들고 어려움에 지칠 때마다 고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닦아내야 했던 그 고생의 한 가운데 있을 때, 자식들 역시 고독과 마이너리티의 아픔에 몸서리 쳤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한인들 가운데 또 다른 조승희 군 같은 젊은이가 없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내 자식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과연 자신할 수 있을까? 제2, 제3의 조승희 군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 1세들이 자성을 해야 한다. 우리가 희생만 하면 다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위로받기 위해 하는 말이다. 1.5세와 2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달러가 아니라 우리의 관심과 사랑과 대화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민자라는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우리의 시각으로 조승희 군을 바라봄으로 이민 1세들의 아픔을 넘어 1.5세와 2세의 가슴속에서 흐르는 눈물이 무엇인지를 봐야 할 것이다. 이민 1세들이야 미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고독이니 외로움이니 하는 단어 자체가 사치스런 장식품에 불과할지 모른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Two Jobs, Three Jobs을 뛰다 보니 늘 몸이 피곤하여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어떻게든 자식들 잘 가르치고, 버젓한 집 한 채 마련하여 보란 듯이 살날을 그리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더구나 신분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을 하다 보니 모든 것이 어렵지만, 내일을 생각하며 그것도 참아냈다. 바쁜 와중에서도 교회에 가서 자식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 기도로 자식들을 위해 제대로 해 주지 못하는 부모의 아픈 마음을 위로받았다. 그렇게 살며 키워온 자식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조승희 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1세들이 열심히 일하고, 그 뿐만 아니라 자식 세대를 위해 모든 희생을 다 한다고 했다. 그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부모로써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을 했는데, 실상 받아들이는 입장에 서 있는 1.5세 2세들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돈 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사이를 이어주는 대화나 교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교감이 없이 청소년기를 지내면서 마음은 메말라지고, 알게 모르게 학교와 또래 집단에서 시달리는 언어의 장벽과 유색인종으로서 당하는 차별로 가슴에 멍이 들게 된다.
그 아픔을 달랠 곳이 없다보니 겨우 한다는 것이 컴퓨터 오락이고, 그나마 성격을 겉으로 표출하는 적극적인 청소년들은 그와 통하는 무리를 형성하여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풀지만, 소극적인 성격의 청소년들은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점점 들어가게 되어 겉모습은 멀쩡한데 실제는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게 살아간다. 그 단절의 정도가 점점 깊어지게 되어 결국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폭발이 된다. 조승희 군의 사건은 이런 결과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식 세대들을 위해 온 인생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다 주었으니 우리 할 일을 다 했다고 한다. 의사도 잘 통하지 않는 자식을 앉혀 놓고 "내가 얼마나 너를 위해, 우리 식구들을 위해 고생한 줄 아냐,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꿈은 네가 버젓하게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해도 과연 자식들이 그 말을 자신을 위해 고생했다는 아버지, 어머니의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지 의문이다.
1세대들이 하루하루 살기 위해 몸부림 칠 때, 힘들고 어려움에 지칠 때마다 고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닦아내야 했던 그 고생의 한 가운데 있을 때, 자식들 역시 고독과 마이너리티의 아픔에 몸서리 쳤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한인들 가운데 또 다른 조승희 군 같은 젊은이가 없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내 자식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과연 자신할 수 있을까? 제2, 제3의 조승희 군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 1세들이 자성을 해야 한다. 우리가 희생만 하면 다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위로받기 위해 하는 말이다. 1.5세와 2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달러가 아니라 우리의 관심과 사랑과 대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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