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하기 위해서 먼저 저편으로 건너 간 사람은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대화의 모험을 시작해야 한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넬 뿐 아니라 계속 대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말을 건네기 전에 나름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다. 물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단계가 통할지는 알 수 없다. 이런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다른 대안이 없다.

어딘가 혼자 있는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대화의 물꼬를 튼다. 얼마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이런 대화를 언제까지 끌고 갈 것인가? 언제쯤 영적인 질문을 던져볼 것인가? 아니면 피상적인 몇 마디의 농담을 주고 받다가 기회를 봐서 슬그머니 일어날 것인가?

옆 자리에 앉아 비행기를 함께 타고 가는 남자가 편하게 느껴져 슬쩍 말을 붙였다. 그는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심란하다고 말했다. 무엇이 그를 심란하게 만들고 있을까? 좀더 치고 들어갈 것인가? 그냥 듣다가 그만 둘 것인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지내다 보면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 다음 잠시 침묵이 흐른다면, 그 때가 영적인 질문을 던질 때이다. 영적인 질문이란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연결된 질문을 의미한다.

질문을 던졌으니 뭔가 대답도 내놔야 할 지 모른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이야기 하는 게 좋다. 나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게 부담이 적다. 듣는 사람은 처음엔 자기와 상관없는 입장에서 듣기 때문에 갈등을 느낄 필요가 없다. 직접적 설교보다 스토리텔링이 청중을 편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수님은 뛰어난 이야기꾼이셨다. 겨자씨, 공중에 나는 새, 들에 핀 백합화부터 강도를 만난 사람 이야기까지 첨엔 상관없는 이야기같지만 끝에 가서는 듣는 사람 누구나 상관있는 이야기가 되어 청중을 영적인 세계로 이끌고 갔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한 방향을 향했다. 하나님이셨다.

현대인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는가? 어떤 사람들에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엔 주가 필요한 사람들이 더 많다. 주가 필요한 사람을 찾아 영적인 질문을 던지면 된다. 그러니 겁먹을 필요 없다. 아흔 아홉번을 실패하더라도 한 번 성공하면 충분한 것 아닌가? 사실 백번 실패해도 헛수고가 아닌 것이 전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