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아침 인터넷을 켜고 이메일을 열자 ‘강영우 박사 췌장암으로 결국 별세’라는 기사를 접하고 놀랐다. 명복을 빌며 기도하고 나서 생전의 강 박사의 모습을 회고해 본다. 내가 강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26년 전이다. 연합감리교 웨슬리 부흥전도단의 뉴욕 하기 수련회의 청년부 강사로 섭외하여 초청해서였다.

1944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중학생 시절 외상으로 실명한 그는 숱한 절망과 역경을 꿋꿋한 의지와 하나님께 대한 숭고한 믿음으로 헤쳐나가 서울 맹아학교를 거쳐 연세대학 문과대학에 입학하여 차석으로 졸업을 했다. 그리고는 한국 장애자 중 최초로 정규 유학생이 되어 피츠버그 대학에 유학, 4년 반 만에 석사와 교육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노스이스턴 일리노이 대학교 교수가 됐다.

그때 40대 초반의 젊음에 카랑카랑한 육성 간증과 자신감 넘치던 그의 강의는 우리 모두에게 큰 감동을 주어 기억이 새롭다. 그는 한때 실명에 대한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시력을 되찾게 해 달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했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력 대신에 무수한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과 정열을 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나의 실명은 장애가 아니라 하늘에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라고 말한다.

장애는 언제 누구에게나 발생할 가능이 있다. 유엔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에 장애인 인구는 4억5천만명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장애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장애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께서는 나의 실명을 사용하고 계심을 분명히 알기에 그 숭고한 사명의 완수를 위하여 힘차게 달려간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 미국 대학교수, 인디애나 주 게리 시 교육위원회 특수 교육부장, 인디애나 주지사 재활자문위원, 인디애나 654지구 국제 로터리 클럽 지역사회 봉사위원장, 한국 대구대학교 사범대학협동학장, UN 세계 장애인 정책위원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에는 차관보급인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렇게 숨 가쁘게 살아오던 그가 뜻밖에 작년 10월 췌장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삶을 살면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지인들에게 보낸 마지막 작별 편지는 우리의 심금을 울려 주었다. “여러분 저로 인해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길 바란다”며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인사 드려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고 하면서 작별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지난 1월 9일에는 1972년 도미를 주선하며 장학금을 주었던 펜실베이니아주 국제 로터리 728지구가 없었다면 오늘의 자기는 없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아마 자신이 받았던 장학금의 몇 배가 넘을 25만 달러를 국제로터리 재단에 기부하였다. 강 박사를 보내며 자랑스러운 일은 역경을 딛고 길러낸 두 아들 이야기이다. 첫째 진석씨는 워싱턴포스트가 선정한 2011년 최고 수퍼 닥터에 뽑혔으며, 둘째 진영씨는 지난해 10월 대통령 선임법율 고문에 선임됐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강영우 박사에게는 사모 석은옥 여사가 있었던 것이 행운이요, 크나큰 축복이었다. 서울 맹아학교 시절 자원봉사자로 왔던 누나 여대생을 아내로 맞아 그 여인의 헌신적 노력과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역경을 돌파할 수 있었고 오늘의 강영우 박사를 있게 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시대의 위인 강영우 박사를 이별할 시간이 되었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나 소천하지만 그의 삶과 남긴 저서를 통하여 오래 오래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