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물녀 사건’이 화제다. 광화문 대형서점 구내식당에서 일어난 일이다. 점심쯤이었다. 사람들이 북적여 발을 디딜 틈도 없었다. 한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 코너에 들어왔다. 아이는 물을 떠오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잠시 후 “악~” 하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어떤 아주머니가 들고 나오던 된장 국물이 아이의 얼굴에 쏟아지는 바람에 두 사람 모두 화상을 입었다.
놀란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쫓아갔다. 잠시 후에 와보니 국물을 끼얹은 사람은 이미 자리를 떠났다. 엄마는 속상해서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이런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대형서점 공공식당에서 아이 화상 테러, 그리고 사라진 가해자를 찾게 도와주세요.”
그러자 사람들은 상황도 잘 모른 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아이 엄마가 올린 글을 보면서 금세 마녀사냥에 나선 것이다. 그래서 ‘국물녀’는 가해자가 되면서 엄청난 욕을 먹었다.
어느 날 가해자로 불리던 여성이 경찰서로 출두했다. 그는 다른 주장을 했다.
“된장국물이 담긴 그릇을 들고 돌아서다 달려오는 아이와 부딪혀 국물을 쏟게 됐다. 나 역시 손에 화상을 입었고, 아이를 식당에서 방치한 부모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으나 아이도 다친 데다 경황이 없어 그냥 나왔다.”
서로 피해자라고 억울하다고 하니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가? 결국 경찰은 CCTV를 판독했다. 그 영상은 이랬다.
아주머니가 식품 코너에서 된장국을 받아 뒤로 돌아 나오는 순간 아이가 뛰어와 부딪혔다. 방어할 틈도 없이 갑자기 진행된 일이었다. 된장국물이 소년의 얼굴에 쏟아지고 국그릇은 바닥에 떨어졌다. 놀란 소년은 그냥 어머니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이어 뜨거운 국물에 얼굴을 데인 소년은 화장실로 가서 응급처치를 받았다. 놀라서 잠시 서 있던 아주머니 역시 주방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데인 손에 얼음찜질을 한 뒤 5분 정도 지나 그 자리를 나섰다.
문제는 바로 사고 후 처리과정이다. 소년의 부모는 “아주머니가 사과도 없이 현장에서 도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손에 얼음찜질을 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아이 쪽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안 보여 아이와 부모가 자리를 뜬 줄 알았다”며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아주머니는 오히려 “아이를 공공장소에 뛰어 다니게 해 이렇게 부딪히게 해 놓고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아 괘씸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했다. 그러니 사과도 화해도 불가능하다.
사건은 결국 쌍방과실로 마무리 되어졌다. 우리는 한쪽 말만 듣고 섣불리 판단하는 오류를 조심해야 한다. 어떤 말이든 양쪽 모두의 주장을 들어봐야 한다. 사실 양쪽 말을 다 들어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한쪽 말만 듣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동일한 것이지만 자기 입장에서 보느냐, 남의 입장에서 보느냐가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좋게 해석한다. 나쁜 행동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좋은 것처럼 해석해 버린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행동은 별 문제가 없는데도 아주 나쁘게 해석해 버린다. 그래서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사람이 정당하게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이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너가 좋은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한다.
20세기 초 독일 사회학자 노버트 엘리아스는 <매너의 역사-문명화의 과정>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너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을 찾은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해 3S를 감내해야만 했다. 온돌방 문화로 부엌에 불을 땔 때 눈물을 나게 만드는 매캐한 연기(Smoke)를 참아야 했다. 메주 띄우는 고약한 냄새(Smell)도 견뎌야 했다. 온 동네 개들이 달려 나와서 위협하는 소리와 밤새 굿하는 소리(Sound)를 이겨내야 했다. 더구나 양변기 문화에 익숙한 그들이 푸세식 화장실에 적응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화에 익숙하지 않고서는 더 큰 일을 할 수 없다. 그들의 입장과 처지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수 없다.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라. 그러면 서로간의 입장 차이는 쉽게 좁혀진다. 얼굴을 붉히며 서로 갈등하는 것도 의외로 쉽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부모는 자식의 처지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라. 고용자는 고용인의 입장에서 접근해 보라. 영원히 풀기 어려운 고부갈등도 서로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 얼마든지 배려할 수 있다.
문제가 자꾸 커지는 것은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니 섭섭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짜증스러워진다. 그래서 갈등은 증폭된다.
경영의 신이라고 부르는 일본의 기업인이 있다. 바로 마쓰시타 고노스케이다. 어느 날 그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한 식당을 찾았다. 6명의 일행은 모두 쇠고기 스테이크를 시켜 먹었다. 어느덧 메인 메뉴 식사를 끝마쳤다. 그때 마쓰시타 회장은 비서에게 “스테이크를 만든 요리사를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혹시나 비서가 실수할까봐서 재차 당부했다. “매니저가 아니라 요리사를 데려오게.”
이쯤 되자 비서는 상황이 심상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마쓰시다 회장은 스테이크를 먹다가 절반쯤 남긴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금 후이면 난감한 장면이 펼쳐지리라 생각한 것이다.
잠시 후에 요리사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룸으로 들어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명한 마쓰시다 회장의 호출이다 보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스테이크를 만든 요리사는 걱정스레 물었다.
“스테이크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마쓰시다 회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오. 스테이크는 아주 훌륭하고 맛있었어요. 하지만 난 반밖에 먹을 수가 없소. 이건 절대 당신의 요리가 맛이 없어서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시오. 쇠고기는 정말 부드럽고 맛이 있었소. 당신의 요리 실력도 완벽했소. 그런데 내 나이 여든이 넘다보니 소화 능력이 예전 같지가 않군.”
순간 요리사와 거기에 함께 있는 동행인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상도 못한 상황에 서로를 흘끔흘끔 쳐다볼 뿐이었다.
마쓰시다 회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직접 말해주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소. 내가 남긴 스테이크 반쪽이 그대로 주방으로 되돌아가면 혹시 자네가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일세.”
그제야 사람들은 마쓰시다 회장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진심어린 마음에 놀랐고, 그 후에 더욱 적극적으로 그와의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
사실 인간은 아주 이기적인 존재이다. 자신을 생각하느라 상대방은 생각해 줄 겨를도 없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금만 배려해도 상황은 전혀 달라질 텐데 좀처럼 그렇게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어할지.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상처를 받을지. 얼마나 곤란할지.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을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아는가? 제자들은 그 여인에게 화를 냈다. 심지어 그 여인의 행동을 혹독하게 비난했다. “이 많은 돈을 왜 쓸데없이 허비하느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생각해 보라. 우리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스스로 의롭고 경건하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이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따진다. 그러나 그들이 이 여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주려고 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상황을 목격했을 때,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자.
놀란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쫓아갔다. 잠시 후에 와보니 국물을 끼얹은 사람은 이미 자리를 떠났다. 엄마는 속상해서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이런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대형서점 공공식당에서 아이 화상 테러, 그리고 사라진 가해자를 찾게 도와주세요.”
그러자 사람들은 상황도 잘 모른 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아이 엄마가 올린 글을 보면서 금세 마녀사냥에 나선 것이다. 그래서 ‘국물녀’는 가해자가 되면서 엄청난 욕을 먹었다.
어느 날 가해자로 불리던 여성이 경찰서로 출두했다. 그는 다른 주장을 했다.
“된장국물이 담긴 그릇을 들고 돌아서다 달려오는 아이와 부딪혀 국물을 쏟게 됐다. 나 역시 손에 화상을 입었고, 아이를 식당에서 방치한 부모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으나 아이도 다친 데다 경황이 없어 그냥 나왔다.”
서로 피해자라고 억울하다고 하니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가? 결국 경찰은 CCTV를 판독했다. 그 영상은 이랬다.
아주머니가 식품 코너에서 된장국을 받아 뒤로 돌아 나오는 순간 아이가 뛰어와 부딪혔다. 방어할 틈도 없이 갑자기 진행된 일이었다. 된장국물이 소년의 얼굴에 쏟아지고 국그릇은 바닥에 떨어졌다. 놀란 소년은 그냥 어머니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이어 뜨거운 국물에 얼굴을 데인 소년은 화장실로 가서 응급처치를 받았다. 놀라서 잠시 서 있던 아주머니 역시 주방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데인 손에 얼음찜질을 한 뒤 5분 정도 지나 그 자리를 나섰다.
문제는 바로 사고 후 처리과정이다. 소년의 부모는 “아주머니가 사과도 없이 현장에서 도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손에 얼음찜질을 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아이 쪽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안 보여 아이와 부모가 자리를 뜬 줄 알았다”며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아주머니는 오히려 “아이를 공공장소에 뛰어 다니게 해 이렇게 부딪히게 해 놓고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아 괘씸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했다. 그러니 사과도 화해도 불가능하다.
사건은 결국 쌍방과실로 마무리 되어졌다. 우리는 한쪽 말만 듣고 섣불리 판단하는 오류를 조심해야 한다. 어떤 말이든 양쪽 모두의 주장을 들어봐야 한다. 사실 양쪽 말을 다 들어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한쪽 말만 듣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동일한 것이지만 자기 입장에서 보느냐, 남의 입장에서 보느냐가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좋게 해석한다. 나쁜 행동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좋은 것처럼 해석해 버린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행동은 별 문제가 없는데도 아주 나쁘게 해석해 버린다. 그래서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사람이 정당하게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이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너가 좋은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한다.
20세기 초 독일 사회학자 노버트 엘리아스는 <매너의 역사-문명화의 과정>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너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을 찾은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해 3S를 감내해야만 했다. 온돌방 문화로 부엌에 불을 땔 때 눈물을 나게 만드는 매캐한 연기(Smoke)를 참아야 했다. 메주 띄우는 고약한 냄새(Smell)도 견뎌야 했다. 온 동네 개들이 달려 나와서 위협하는 소리와 밤새 굿하는 소리(Sound)를 이겨내야 했다. 더구나 양변기 문화에 익숙한 그들이 푸세식 화장실에 적응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화에 익숙하지 않고서는 더 큰 일을 할 수 없다. 그들의 입장과 처지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수 없다.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라. 그러면 서로간의 입장 차이는 쉽게 좁혀진다. 얼굴을 붉히며 서로 갈등하는 것도 의외로 쉽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부모는 자식의 처지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라. 고용자는 고용인의 입장에서 접근해 보라. 영원히 풀기 어려운 고부갈등도 서로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 얼마든지 배려할 수 있다.
문제가 자꾸 커지는 것은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니 섭섭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짜증스러워진다. 그래서 갈등은 증폭된다.
경영의 신이라고 부르는 일본의 기업인이 있다. 바로 마쓰시타 고노스케이다. 어느 날 그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한 식당을 찾았다. 6명의 일행은 모두 쇠고기 스테이크를 시켜 먹었다. 어느덧 메인 메뉴 식사를 끝마쳤다. 그때 마쓰시타 회장은 비서에게 “스테이크를 만든 요리사를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혹시나 비서가 실수할까봐서 재차 당부했다. “매니저가 아니라 요리사를 데려오게.”
이쯤 되자 비서는 상황이 심상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마쓰시다 회장은 스테이크를 먹다가 절반쯤 남긴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금 후이면 난감한 장면이 펼쳐지리라 생각한 것이다.
잠시 후에 요리사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룸으로 들어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명한 마쓰시다 회장의 호출이다 보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스테이크를 만든 요리사는 걱정스레 물었다.
“스테이크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마쓰시다 회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오. 스테이크는 아주 훌륭하고 맛있었어요. 하지만 난 반밖에 먹을 수가 없소. 이건 절대 당신의 요리가 맛이 없어서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시오. 쇠고기는 정말 부드럽고 맛이 있었소. 당신의 요리 실력도 완벽했소. 그런데 내 나이 여든이 넘다보니 소화 능력이 예전 같지가 않군.”
순간 요리사와 거기에 함께 있는 동행인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상도 못한 상황에 서로를 흘끔흘끔 쳐다볼 뿐이었다.
마쓰시다 회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직접 말해주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소. 내가 남긴 스테이크 반쪽이 그대로 주방으로 되돌아가면 혹시 자네가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일세.”
그제야 사람들은 마쓰시다 회장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진심어린 마음에 놀랐고, 그 후에 더욱 적극적으로 그와의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
사실 인간은 아주 이기적인 존재이다. 자신을 생각하느라 상대방은 생각해 줄 겨를도 없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금만 배려해도 상황은 전혀 달라질 텐데 좀처럼 그렇게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어할지.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상처를 받을지. 얼마나 곤란할지.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을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아는가? 제자들은 그 여인에게 화를 냈다. 심지어 그 여인의 행동을 혹독하게 비난했다. “이 많은 돈을 왜 쓸데없이 허비하느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생각해 보라. 우리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스스로 의롭고 경건하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이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따진다. 그러나 그들이 이 여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주려고 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상황을 목격했을 때,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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