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아이다호주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지니 제이크라는 18세 소녀가 숨을 거둔 일이 있었다. 그녀는 이미 2010년 10월에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남자친구와 결혼해서 만들어 갈 행복한 삶을 꿈꾸며 강인한 의지를 발휘하며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다.

기나긴 병마와의 싸움끝에 극적으로 암세포가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완치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며, 두 사람은 더 열심히 미래를 위해 준비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소식이 찾아왔다. 바로 지니가 임신을 한 것이었다.

축하를 받아야 마땅한 새 생명의 소식은 지니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항암치료를 그만 두어야만 하는데, 그럴 경우 지니 자신이 죽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이 기가 막힌 운명속에서 지니는 결국 아이를 살리고 자신이 죽는 길을 선택했으며, 마침내 2011년 11월 9일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아이의 엄마인 지니는 그 후 12일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지니는 분만실로 들어 가기 전에 간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젠 다 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지니의 이야기를 보면서 가슴이 도려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꼈다. 특히, 지니가 자신의 생명과 바꾼 갓난 아이와 함께 누워있는 사진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느끼게 해 주었다. 도대체 무엇이 지니로 하여금 자신의 생명과 남편이 될 남자친구와 함께 힘겹게 가꾸고 있었던 미래까지도 포기하게 만들었을 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보지도 못한 아이를 향한 모성애가 이토록 질 긴 것일 까. 뱃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 항암치료를 중단하여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견디게 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정답은 이미 나와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나는 이 앞에 하나 더 붙이고 싶다. 바로 “희생적인” 사랑이다. 한 생명을 진정으로 살리려면 바로 누군가가 그를 위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나는 살고 너는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공식으로는 타인을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상담을 공부하고 훈련받고 가르치고 있는 모든 과정속에서 인간 상담자로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하며 느끼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한다. 암흑과 같은 심리적이고 영적인 계곡을 지나는 내담자를 위해서 상담자가 죽을 수는 없는 노롯이다. 그것은 이미 상담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상담가가 내담자의 마음을 읽으며 공감이 이루어진다해도 어쩔 수 없이 상담가와 내담자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 (boundary)를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상담가가 지켜야 할 상담윤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런 의미에서 가르치고 있는 분야가 일반 상담학이 아니라 기독교상담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지 알 수 없다. 일반 상담학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상담을 통하여 내담자의 아픔과 절망과 울부짖음의 현장속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며 갈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생명 그리고 희생의 사랑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깊은 치유를 경험하게 해 준다.

자신의 뱃속에서 잉태한 한 생명을 위하여 목숨을 포기한 지니 레이크의 모성애는 분명 값지다. 그러나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던지신 예수님의 사랑은 더욱 값지다고 할 수 있겠다. 올 사순절 기간에 우리 마음에, 가정에, 교회에 회복과 치유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갈망한다. 그저 새해가 되니 또 고난과 부활절이 왔구나 하는 종교적인 의미로만 이 시간을 맞이하지 말고,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십자가의 능력을 가지고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는 우리 기독교인과 교회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장보철 목사, 워싱턴침례대학교 기독교상담학 전임교수/ bcchang@wbcs.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