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로부터 약3,700 km나 떨어져 지구상에 육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 이스터 섬은 1722년 4월 5일 네델란드 사령관 야콥 로베겐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 때가 부활절이라 이 섬의 이름을 이스터 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섬을 라파누이(큰 땅)라고 부르는 원주민들은 폴리네시아에서 카누를 타고 이주하여 온 것으로 추정한다. 섬이 발견될 당시 이 섬의 주민은 5-6천 명 정도였는데 1805년 미국의 노예 상인들이 22명의 원주민을 잡아갔고 1862년 페루의 노예상인들이 이 섬의 왕과 귀족들을 포함한 원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 1877년 이스터섬의 주민은 110명만이 남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섬이 발견 될 당시 섬에는 약 900개에 이르는 모아이라고 불리는 거대 석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큰 것은 높이가 20m 나 되고 무게가 270톤이나 된다고 하니 이 많은 석상들이 어떻게 나무 한 그루없고 바위를 옮길 수 있는 재료도 만들 수 없는 이 척박한 곳에 세워져 있냐는 것이다.

이 숙제를 최근 죤 프랜리와 사라 킹 두 학자가 꽃씨를 분석해서 옛날에 이 섬에 어떤 식물들이 얼마나 번성하고 있었는지를 밝혀내었는데 원래 이 섬에는 나무와 잡목이 울창하고 비옥하여 온갖 동물들과 새들 그리고 식물이 함께하는 파라다이스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당시 인구는 약 7천에서 2만명 정도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왜 이 섬이 이렇게 황폐한 채로 남아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스터섬의 비극이다. 기원 후 약 400년 경에 폴리네시안들이 최초로 이섬에 정착했는데 이 때만하더라도 섬은 파라다이스 자체였다. 그러던 것이 기원 후 800년 경부터 이 섬의 산림이 파괴되기 시작했고 약 1400년 경 이후에는 주 수종이었던 야자나무의 멸종과 함께 숲이 사라지고 만다.

야자나무는 이 섬에 가장 풍부한 나무로 석상을 옮기거나 세우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당시 그들의 주식이었던 고래사냥이나 어업을 위해 큰 배를 만드는데 이용했을 것이고 그 야자 나무 열매와 그 즙은 섬 주민의 중요한 식품이었을 것이다. 나무가 사라지면서 동시에 동물과 새의 흔적도 사라지는데 더 이상 벨 수 있는 나무 한 그루 남지않는 최악의 자연파괴가 일어나게 되고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사라지자 결국은 식인행위까지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처음 이 섬이 세상에 알려질 당시 주민의 수는 고작 원래 인구의 10%에서 25%정도만 남게 되고 만다.

<문명의 파괴>의 저자 제라드 다이어몬드는 이스터섬의 비극을 부족간의 지나친 경쟁에서 찾는다. 이 섬에는 “짧은 귀 부족”과 “큰 귀 부족”, 두 부족이 서로 경쟁하며 살고 있었는데 공동의 소유인 자연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다보니 자원은 부족하고, 부족한 자원은 더 치열한 경쟁으로 두 부족을 내몰게 되었다. 차츰 자원이 고갈되면서 자연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자연파괴는 사회붕괴라는 비극을 낳게 하였다는것이다.

특이한 점은 이들이 서로 경쟁하는 동기가 자신들이 섬기는 조상의 석상을 더 크게 세우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더 큰 석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더 큰 돌을 옮겨야 하고 더 큰돌을 옮기려면 더 많은 나무를 베어야 하고 더 많은 돌을 옮기려면 더 많은 인력과 식량을 소모해야 하는데 자연자원의 고갈은 가속도가 붙게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석상들 가운데는 미완성의 석상들이 있는데 미완성 석상의 크기가 완성된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은 이들은 자연자원이 완전히 고갈되어 가는 순간까지도 석상을 만들고 있었고 마지막 남은 한 그루의 나무가 잘려지는 순간에도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바보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부족의 상징인 모아이를 더 크게 만들어 자신들의 부과 권력을 과시하려 경쟁했던 두 부족의 지배계층은 부족 구성원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더 큰 석상을 만들고 그것을 권력의 상징으로 삼고 그렇게함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을 추종세력으로 모아들이는 내부결속의 수단으로 삼아 더 큰 권력을 과시하려 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큰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대 역사를 일으켜 백성을 착취하여 힘을 한 곳으로 집중시킨다. 구약 시대의 이집트 바로 왕이 이스라엘의 반발을 막기위해 라암셋의 국고성을 쌓게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고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위해 부역을 일르켰던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백성들이 요구한 것이 세금과 부역을 덜어달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제라드의 주장처럼 저들은 망해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원을 낭비하면서 석상 세우기 경쟁을 했다. 비극은 다수의 개개인들은 사회전체가 서서히 망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후에 권력층의 잘못을 알고 그들을 축출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은 끝에 와 있었다.

약 600년의 긴 세월 동안 산림이 서서히 파괴되고 있을 때, 권력자들의 지배 논리 구호에 백성들은 눈이 멀어 더 큰 석상을 세우는 것이 최상의 진리인 줄 알고 더 경쟁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찾음으로 오히려 저들은 자연파괴를 부축혔을 것이다. 경쟁이 또 다른 경쟁을 낳는 경쟁의 논리가 자신의 삶을 어렵게 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까지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공범으로 모두가 자멸의 길을 걷고 있음을 저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깨닫지 못한 데 이스터 섬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니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경쟁의 논리로 세워져 가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경쟁 논리의 패배자가 될 것이다. 이스터 섬 주민들이 더 큰 모아이 석상 만드는 경쟁에서 모두가 패한 것처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더 큰 모아이,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다면 우리 모두는 천국에 이르기 전에 바벨 탑이 무너지듯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것이다.

요즘 목회자들에게 인기있는 세미나나 집회의 속을 들어다 보라. 거기 어디에 예수님의 팔복의 말씀이 있는가? 어떻게 하면 교인을 많이 끌어 모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교회 재정을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더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을 지울 수 있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예수님 말씀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교인 수를 늘릴 수 있고 더 큰 교회 건축을 할 수 있는가에 모든 프로그램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모두가 교인들을 모아이 만드는 기술자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 파괴되고 식량이 모자라자 저들은 자기의 조상들이 하던대로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갈 배를 만들기 위하여 나무를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바다로 머리를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저들이 바다로 나가려고 할 때는 배를 만들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 위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저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그들이 모아이를 만들기 위하여 바위를 깨고 쪼아 낸 돌 부스러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모아 돌부스러기에 토란을 심어 주린 배를 채우는 처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피지배계층이 착취당하며 양식부족으로 굶주려 갈 때 지배계층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백성을 위해 권력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백성을 보호하고 다스림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몰랐을 것이다. 백성 없는 권력은 아무 소용이 없는 무익한 것이다. 진정한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위기 상황이 시작될 때 그 위기의 직격탄을 맞는 사람은 결국 상위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위계층의 사람들이다. 어느 사회든 위기의 피해자는 스스로의 보호막이 없는 백성들이다. 전쟁이 일어나도 먼저 다치고 죽는 사람은 경제적 약자들이고 경제적인 위기가 와도 그 피해를 고스란히 온 몸으로 맞는 사람들이 하층민들이다. 만약 지배계층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스터섬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한국의 IMF 당시 그 최악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어차피 돈 있는 사람들은 돈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현재의 미국의 경제 위기 속에서도 명품백화점들은 더 호황을 맞고 있고, 있는 자들은 변동하지 않는 자산을 선호하다보니 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최고가를 갈아치고 있는것이 그 반증이다.

작은 연못에 함께 살던 물고기가 서로 경쟁하다 한 마리가 죽으니 다른 한마리도 죽게 되었다는 민중가요의 가사를 빌리지 않더라도 이성이 있는 인간 사회에도 머리가 부족하여 비극이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산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생각이 인간 사회를 바보들의 경쟁으로 몰아 넣는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도 이런 이기주의적인 개교회주의에서 비롯 된 것을 우리는 안다. 다른 교회야 어찌 되든지 내 교회만 크고 웅장하게 짓다보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스터 섬의 비극 앞에 서있을 수 있다.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