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의 양심 윌리엄 월버포스(1759-1833)는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의 소유자지만 양심은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삼촌의 집에서 자랐지만 오히려 삼촌의 친구였던 그의 영원한 멘토인 존 뉴톤(Amaging Grace 작사)을 만나는 행운을 만난다.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1780년 일약 21세의 나이에 하원의원이 되어 의회를 개혁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젊고 패기에 찬 정치 초년생은 보수주의자들의 높은 벽에 부딪혀 좌절감을 맛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존 뉴톤의 노예해방 운동에 강한 양심의 힘을 느끼는 회심의 경험을 한 후 생명을 걸고 노예폐지 법안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은 로마가 노예의 힘을 빌려 팍스 로마의 길을 닦은 것처럼 노예산업을 통해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만들었기에 그 법안을 폐기한다는 것은 곧 나라 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영국의 수입의 1/3이 노예무역을 통한 수입이었으니 그 반대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짐작이 간다. 윌버포스는 이 법안으로 수많은 죽음의 협박에 시달렸지만 양심없는 정치인으로 살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각오로 150여 번이나 되는 대의회 논쟁을 통해 “영국이 진정한 위대한 나라가 되려면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의회에서 서슴없이 외쳤다. “Remember, God made man equal."
선한 양심은 언제나 승리하듯이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양심의 소리를 듣고 만들기 시작한 노예해방 법안이 46년 만에 드디어 영국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침상에서 이 법안의 통과 소식을 들은 영국의 양심 윌버포스는 3일 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안치된 윌버포스의 양심은 부패한 영국에 경종을 울렸고 대영제국의 화려한 꽃을 피운 빅토리아 시대의 초석이 되었다. 이 양심을 에브라함 링컨이 물려받았고 현대에 와서 마틴 루터 킹이 전 세계에 불을 붙였다.
윌버포스가 노예제도 폐지 캠페인을 벌일 때 이 노예제도를 연구하면서 분명한 사실을 하나 발견한다. 그것은 당시 영국은 아프리카 서안에서 흑인들을 강제 납치하여 서인도 제도의 플렌테이션 농장에 팔고 거기서 다시 원자재를 싣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삼각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벌고 있었다. 이 삼각노선은 황금노선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노예해방 운동가들이 조사를 하면 할수록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엄청난 이익이 나는 사업인데도 관련된 사람들의 인생은 불행으로 끝이 났던 것이다. 백인 선장이나 선원들은 더 포악 황폐해지고 술과 노름으로 모든 것을 탕진해 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항해 도중 선원들의 사망률이 25%나 되어 일반 무역선의 10배가 넘었다.
노예해방 운동자들은 그 원인을 악의 시스템 속에서 찾았다. 노예상인들은 흑인들의 손발을 쇠고랑으로 묶고 겹겹이 눕혀 개나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며 항해했다. 병이 난 흑인들을 산채로 바다에 던져버렸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여자 흑인들을 겁탈하는,
노예무역선은 그 자체가 악의 덩어리였다. 악으로 시작하는 사업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있다. 인신매매, 마약거래, 노름, 조직폭력배, 갱, 마피아, 인류역사 속에 이들이 잘되고 그 가문이 성공한 일가를 이루었다는 얘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이 다 악의 시스템으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Edmund Burke(1729-1797)는 영국의 무역항인 브리스톨 출신의 하원의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원의 주요 법안 표결시 선거구의 주민들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투표하였다. 특히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아일랜드 프랑스, 영국 식민지와의 통상을 자유화하는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무역항인 브리스톨에는 막대한 경제적 기득권이 걸려있는 것이었고 채무권자법도 지불능력이 없는 채무자를 구제하는 내용으로 무역으로 치부한 브리스톨 부자(채권자) 유권자들에게는 불리한 법이었다.
1780년 총선에서 브리스톨 유권자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버크는 브리스톨 시청에서 명연설을 한 후 후보를 사퇴한다. “국회의원은 전국적(national) 이해와 선거구(local)의 이해가 대립될 때 선거구의 이해를 초월해 국민적 확대된 시야로 ‘사물의 본질’을
보고 의정활동을 해야 한다.”그러면서 그는 다음의 명언을 남긴다. “The only thing necessary for the triumph of Evil is for the good man to do nothing.”(악의 승리는 선의 침묵이다.)
당장 자기 앞의 이익보다 대의를 보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먼저 생각하는 행동하는 양심의 선각자들이다. 예수님도 달란트의 비유에서 5달란트로 5달란트의 이윤을 남긴 종과 2달란트로 또 다른 2달란트를 남긴 종들을 칭찬하셨지만 1달란트를 받아 그것을 숨겨 두었다 그냥 바친 종에게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책망시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쫒으라고 명셨다. 명령을 받았음에도 행동하지 않는 선은 분명히 악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시고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도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은 마음에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님의 명령은 동사형이지 명사형이 아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두가지 명제를 안고 산다. 하나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요, 다른 하나는 내가 변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이다. 어쩌면 우리는 강도를 만나 다쳐 신음하는 형제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처럼 교회에 출석만 잘 하면 선한 사람인양 잘못된 신앙을 갖고 brain wash된 죽은 신앙을 갖고 사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행동하는 제자가 되길 원하셨지 성경공부로 끝나 침묵하는 신학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야고보 사도의 지적처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불의에 도전하는 행동하는 사람들의 역사이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선은 이땅에 이루어 진다.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타살되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로마가 망한 것이 다른 민족이 강성해서가 아니라 현재에 안주하고자 하는 행동없는 사람들로 인해 망한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왜 망했는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행동하는(순종하는) 의인 10명이 없기에 망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후로 세상은 거짓이 아비인 사탄이 지배하는 구조적 악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 크리스쳔들이 침묵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악은 스스로 승리의 축배를 들것이다. 민주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던 미국의 한 복판 월가가 일으킨 금융대란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가? 1% 대 99%의 양극화를 보면서 어디에서 부의 정의를 찾을 수 있는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핵인 자본주의가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고 있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국가가 경제를 시장에 맡겨 놓은 결과가 1%의 부자들만 좋은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젠 누구의 탓할 것도 없다. 시장만능주의만 믿고 온갖 파생상품으로 서민의 돈을 노린 증권가나 역대로 월가의 CEO들을 재무부장관으로 앉혀 놓고 경제활성화만 부르짖던 정부나 외상이면 소도 잡아 먹는 국민들이나 모두가 부의 탐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불의로 잔치를 벌이다 이런 참사를 맞게 된것이다. 전세계를 불안으로 몰아 놓은 악은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의와 정의를 부르짖어야 한다. 이것은 한 개인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자기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개혁을 부르짖기 전에 내부 개혁을 일으켜야 한다. 자기 집에 들어 온 도둑을 내어 쫒았다면 이제 집안에 무엇이 잘못되어었는가 살피는 것이 개혁이다. 문제점을 발견했으면 대문을 더 튼튼히 만들던지 열쇠를 더 강한 것으로 바꾸던지 아니면 집안에 CCTV라도 다는 자기 개혁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 교계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개혁을 해야 한다. 교회의 개혁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교회개혁이요 종교개혁이다. 개혁을 행동으로 옮긴 부류도 개혁을 당한 부류도 모두 성경으로 돌아 가야 한다. 개혁에 성공했다고 점령군처럼 교만해서도 안되고 마치 선거에서 실패한 것이 개혁을 당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근신하는 모습 가운데 다른 기회를 기다리면 하나님이 필요하면 반드시 사용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 행동하는 선이다.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화에 먼저 믿는 사람이 행동하는 선으로 나서야 한다. 세상은 교회가 행동을 하는가 침묵하고 있는가 주시하고 있다. 교회에 실망한 불신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행동하는 크리스천, 행동하는 교회,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이다. 악의 승리 그것은 선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은 로마가 노예의 힘을 빌려 팍스 로마의 길을 닦은 것처럼 노예산업을 통해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만들었기에 그 법안을 폐기한다는 것은 곧 나라 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영국의 수입의 1/3이 노예무역을 통한 수입이었으니 그 반대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짐작이 간다. 윌버포스는 이 법안으로 수많은 죽음의 협박에 시달렸지만 양심없는 정치인으로 살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각오로 150여 번이나 되는 대의회 논쟁을 통해 “영국이 진정한 위대한 나라가 되려면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의회에서 서슴없이 외쳤다. “Remember, God made man equal."
선한 양심은 언제나 승리하듯이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양심의 소리를 듣고 만들기 시작한 노예해방 법안이 46년 만에 드디어 영국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침상에서 이 법안의 통과 소식을 들은 영국의 양심 윌버포스는 3일 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안치된 윌버포스의 양심은 부패한 영국에 경종을 울렸고 대영제국의 화려한 꽃을 피운 빅토리아 시대의 초석이 되었다. 이 양심을 에브라함 링컨이 물려받았고 현대에 와서 마틴 루터 킹이 전 세계에 불을 붙였다.
윌버포스가 노예제도 폐지 캠페인을 벌일 때 이 노예제도를 연구하면서 분명한 사실을 하나 발견한다. 그것은 당시 영국은 아프리카 서안에서 흑인들을 강제 납치하여 서인도 제도의 플렌테이션 농장에 팔고 거기서 다시 원자재를 싣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삼각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벌고 있었다. 이 삼각노선은 황금노선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노예해방 운동가들이 조사를 하면 할수록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엄청난 이익이 나는 사업인데도 관련된 사람들의 인생은 불행으로 끝이 났던 것이다. 백인 선장이나 선원들은 더 포악 황폐해지고 술과 노름으로 모든 것을 탕진해 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항해 도중 선원들의 사망률이 25%나 되어 일반 무역선의 10배가 넘었다.
노예해방 운동자들은 그 원인을 악의 시스템 속에서 찾았다. 노예상인들은 흑인들의 손발을 쇠고랑으로 묶고 겹겹이 눕혀 개나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며 항해했다. 병이 난 흑인들을 산채로 바다에 던져버렸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여자 흑인들을 겁탈하는,
노예무역선은 그 자체가 악의 덩어리였다. 악으로 시작하는 사업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있다. 인신매매, 마약거래, 노름, 조직폭력배, 갱, 마피아, 인류역사 속에 이들이 잘되고 그 가문이 성공한 일가를 이루었다는 얘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이 다 악의 시스템으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Edmund Burke(1729-1797)는 영국의 무역항인 브리스톨 출신의 하원의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원의 주요 법안 표결시 선거구의 주민들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투표하였다. 특히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아일랜드 프랑스, 영국 식민지와의 통상을 자유화하는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무역항인 브리스톨에는 막대한 경제적 기득권이 걸려있는 것이었고 채무권자법도 지불능력이 없는 채무자를 구제하는 내용으로 무역으로 치부한 브리스톨 부자(채권자) 유권자들에게는 불리한 법이었다.
1780년 총선에서 브리스톨 유권자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버크는 브리스톨 시청에서 명연설을 한 후 후보를 사퇴한다. “국회의원은 전국적(national) 이해와 선거구(local)의 이해가 대립될 때 선거구의 이해를 초월해 국민적 확대된 시야로 ‘사물의 본질’을
보고 의정활동을 해야 한다.”그러면서 그는 다음의 명언을 남긴다. “The only thing necessary for the triumph of Evil is for the good man to do nothing.”(악의 승리는 선의 침묵이다.)
당장 자기 앞의 이익보다 대의를 보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먼저 생각하는 행동하는 양심의 선각자들이다. 예수님도 달란트의 비유에서 5달란트로 5달란트의 이윤을 남긴 종과 2달란트로 또 다른 2달란트를 남긴 종들을 칭찬하셨지만 1달란트를 받아 그것을 숨겨 두었다 그냥 바친 종에게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책망시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쫒으라고 명셨다. 명령을 받았음에도 행동하지 않는 선은 분명히 악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시고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도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은 마음에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님의 명령은 동사형이지 명사형이 아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두가지 명제를 안고 산다. 하나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요, 다른 하나는 내가 변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이다. 어쩌면 우리는 강도를 만나 다쳐 신음하는 형제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처럼 교회에 출석만 잘 하면 선한 사람인양 잘못된 신앙을 갖고 brain wash된 죽은 신앙을 갖고 사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행동하는 제자가 되길 원하셨지 성경공부로 끝나 침묵하는 신학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야고보 사도의 지적처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불의에 도전하는 행동하는 사람들의 역사이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선은 이땅에 이루어 진다.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타살되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로마가 망한 것이 다른 민족이 강성해서가 아니라 현재에 안주하고자 하는 행동없는 사람들로 인해 망한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왜 망했는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행동하는(순종하는) 의인 10명이 없기에 망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후로 세상은 거짓이 아비인 사탄이 지배하는 구조적 악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 크리스쳔들이 침묵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악은 스스로 승리의 축배를 들것이다. 민주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던 미국의 한 복판 월가가 일으킨 금융대란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가? 1% 대 99%의 양극화를 보면서 어디에서 부의 정의를 찾을 수 있는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핵인 자본주의가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고 있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국가가 경제를 시장에 맡겨 놓은 결과가 1%의 부자들만 좋은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젠 누구의 탓할 것도 없다. 시장만능주의만 믿고 온갖 파생상품으로 서민의 돈을 노린 증권가나 역대로 월가의 CEO들을 재무부장관으로 앉혀 놓고 경제활성화만 부르짖던 정부나 외상이면 소도 잡아 먹는 국민들이나 모두가 부의 탐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불의로 잔치를 벌이다 이런 참사를 맞게 된것이다. 전세계를 불안으로 몰아 놓은 악은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의와 정의를 부르짖어야 한다. 이것은 한 개인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자기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개혁을 부르짖기 전에 내부 개혁을 일으켜야 한다. 자기 집에 들어 온 도둑을 내어 쫒았다면 이제 집안에 무엇이 잘못되어었는가 살피는 것이 개혁이다. 문제점을 발견했으면 대문을 더 튼튼히 만들던지 열쇠를 더 강한 것으로 바꾸던지 아니면 집안에 CCTV라도 다는 자기 개혁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 교계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개혁을 해야 한다. 교회의 개혁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교회개혁이요 종교개혁이다. 개혁을 행동으로 옮긴 부류도 개혁을 당한 부류도 모두 성경으로 돌아 가야 한다. 개혁에 성공했다고 점령군처럼 교만해서도 안되고 마치 선거에서 실패한 것이 개혁을 당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근신하는 모습 가운데 다른 기회를 기다리면 하나님이 필요하면 반드시 사용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 행동하는 선이다.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화에 먼저 믿는 사람이 행동하는 선으로 나서야 한다. 세상은 교회가 행동을 하는가 침묵하고 있는가 주시하고 있다. 교회에 실망한 불신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행동하는 크리스천, 행동하는 교회,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이다. 악의 승리 그것은 선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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