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굿뉴스미션워싱턴필름(대표 이태봉 목사)이 한국성은교회 장재효 목사의 목회 일대기를 다큐멘터리(http://www.youtube.com/watch?v=ozEoEVL7-qc&feature=player_embedded)로 제작했다. 군소신학교 교무처장 및 교수직을 감당하다 1970년대 목회 전선에 뛰어든 장재효 목사는 한국 성은교회 외에도 7개 교회를 개척하고 전세계 1,000여개 교회 및 선교활동을 돕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다양한 강의, 부흥회 활동을 해오고 있다.

장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보수) 총회장과 국제신학대학원 초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성은동산 원장, 선목회 회장, 국제성은복음선교회 총재, 전국기도원총연합회 총재를 맡고 있다. 장재효 목사는 한국일보 2009 대한민국 국민감동 대상 수상을 받기도 했다.

♣기독일보에서는 장재효 목사의 목회 에세이 '야향(野香) 장재효(張在孝) 목사의 목회와 선교'를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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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물 팔아 마련한 무허가촌 전세 3평 교회로

1970년 4월 10일 그 당시 어느 군소 신학교 교수 겸 교무처장일을 하던 중 사역자(교역자) 양성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이 목회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집사람과 삼각산으로 갔다. 겟세마네 기도원을 지나 더 올라가서, 골짝에 붙어있는 가파른 바위위에 올라 3일 간 단식 기도를 했다.

낮에는 나무그늘에서 기도하고 밤이면 정신을 집중하고 기도하기 위해 절벽 바위 위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부르짖었다. 3일이 지난 새벽에 교회를 개척하라시는 영감을 받았다. 어디에 세울 것인가를 계속 기도했고, 주님께서 성동구 옥수동으로 인도하셨다. 그 날 오전, 누군가가 준비해온 음식으로 기운을 얻고 하산하여 성동구 옥수동(무허가촌) 424번지에 3평도 못되는 지하방을 15만원 전세로 얻었는데, 돈이 없어 결혼선물로 준 반지와 목걸이를 아내가 팔아와서 그 돈으로 성은교회가 개척 설립되었는데, 그 때가 1970년 5월 17일이었다.

▲1970년대 성은교회가 개척된 달동네 판자촌 모습.

금호동이나 옥수동은 시내(사대문안)에서 초상이 나면 시거문을 통하여 시체를 반출해서 묻어버리는 이름없는 묘지였는데, 1961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정책에 따라 산업화 시대로 들어가면서 호남 사람들이 대거 상경하여 무허가 주택을 형편 따라 건립하며 우거하는 달동네 판자촌이었다.

밤낮없이 망치소리가 시끄럽게 들린 후 어느새 무허가 건물이 세워지고 낯선 사람들이 입주하게 되는데, 그리하여 옥수동은 매봉산 봉우리 턱 밑 까지 무허가 주택으로 꽉 들어서게 되었다. 직업도 직장도 없는 가정들이 대부분이었고 부지런한 아내들은 시내 식당이나 혹은 파출부로 생계를 위해 수고하는 가 하면 남정네들은 그늘에 모여앉아 장기나 바둑, 화투를 치면서 노동력을 허비하는 판세여서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회에 등록하는 분들의 복색은 물론 얼굴에도 가난에 찌들은 모습들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병이 낫어도 병원에 갈 돈이 없어 무작정 앓고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교회 다니면서 병고침을 받은 신도들이 병든 이웃을 전도하려 데려왔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주께서 즉시 치유해 주심으로 영권에 의한 신유와 귀신들려 시달리는 자도 귀신이 쫓겨 남으로 회복되고 간질병자도 낫게 하시고 여러가지로 난치병 혹은 불치병이라 했던 병들을 치유해 주심으로, 개척 교회는 1년 만에 새 예배당을 지을 정도로 부흥했다.

집 값 떨어진다며 투서하던 주민들, 교회당 철거하기도
▲성은교회 개척 돌비 앞에서. 장재효 목사.
개척 설립 3개월 만에 지하방 교회에서 2층 12평 짜리로 확장 이전했고, 1971년 10월부터 12월까지 옥수동 산 5번지에 시유지 45평을 구입하여 시멘트 브로크 벽, 스레트 지붕으로 27평짜리 새 예배당을 건립 입당예배를 드렸다. 교회가 계속 사람들이 모여들고, 부흥 성장해 가는 가운데 ‘호사다마’란 격으로 이웃 주민들 모두가 시유지 무허가 건물에 살면서도 교회 때문에 자기들 집 값이 떨어진다면서 교회를 없애 버리자고 모의한 후 성동구청과 서울 시청과 청와대 민원실까지 여러차례 고발 투서를 했다.

결국 무허가 건물인 교회당이 철거 되었는데 민정시찰을 통하여 실의와 절망,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불행한 주민들에게 신앙으로 새 삶의 의욕과 아낌없는 구제와 기도를 통한 축사(귀신쫓아내는 것)와 병 치유로 이 곳에 꼭 필요한 교회라면서 그 당시 서울 시장 Y 씨의 배려로 예배당 허문 자리에 서울 특별시 마크와 글자가 크게 쓰인 대형 천막 2개를 연결, 천막 교회 예배실을 만들어 주셨다.

여름 천막교회는 숨이 막히고
기도하니 보내준 사람 천사 집사님


그러나 여름이 되면서 천막 안은 너무나 더웠고, 땀이 흐르고 숨이 막히는 형편이라 지속하기가 어렵게 돼 성도들에게 단식 기도를 선포하고 목자도 계속 강단에서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런데 다른 교회 다니는 김 모 집사님이 124만원이 들어있는 통장과 인장을 집 사람에게 주면서 이 돈은 하나님께서 드리라고 했다면서 예배실 마련하는 데 보태어 써 달라고 했다.

내가 알아보니 그 분은 두 아들을 양육하는 과부 집사님으로 남편이 미군 차에 변사해서 받은 변상금, 위자료 였음을 알고 그 여 집사님에게 돌려줬다. 그러나 그 날 밤, 다시 집 사람에게 간곡한 말로 전달했고 이렇게 하길 4번이나 반복했다. 그 사이 옥수동 424-563번지에 33평짜리 다이마루 공장 건물과 약 7평짜리(방 2, 부엌 1) 건물이 따로 있는 시유지 120평을 소개 받고 김 집사님의 성금으로 그것을 구입, 공장을 예배당으로 개조하고 작은 건물은 사택으로 사용하게 되니 온 천하를 얻은 것처럼 여유롭고 흐뭇했다.

김 집사님의 돈을 사용하기 전에 제직회를 열고 이 통장의 돈은 그 여 집사님에겐 남편과 같은 돈이고, 두 아들에겐 아버지와 같은 돈이기 때문에 우리가 매달 10만원 씩 적립하여 2년 뒤엔 200만원 (원리금 포함) 을 돌려갚기로 결의했다. 교회는 계속 부흥해 앉을 자리가 모자랐다.

▲여신도들이 교회 마당 모래를 파 직접 벽돌을 제작해 팔았다. 벽돌값 외에 운반비로 한 장에 3원 씩 받고 교회의 여신도들이 여러 날 고무 다라이에 담아 이고 배달해서 푼 돈을 벌어 쓰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 마당이 계곡이라 바닥을 파보니 마사 모래가 벽돌 만들기에 안성맞춤이라며, 집사님과 성도들이 매 토요일 마다 아침 일찍 부터 저녁까지 시멘트 벽돌을 만들었는데 랜가 라는 작은 벽돌 7만여장과 4인치 브로크 벽돌 2만 5천 장을 만들어 집채 만큼 높이 쌓았다. 그 때 마침 교회 주변 지역에 무허가 건물 개량 하라는 허가가 나서 이웃 집마다 집을 개축하면서 교회 벽돌 팔 것을 간청, 불티 나게 팔렸다. 벽돌값 외에 운반비로 한 장에 3원 씩 받고 교회의 여신도들이 여러 날 고무 다라이에 담아 이고 배달해서 푼 돈을 벌어 쓰기도 했다.

<다음 편에 계속>